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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장에서] 백화점 정기세일이 없어진다…백화점은 ‘갑’일까

“더이상 백화점이 입점 업체에 갑질하는 시대가 아니에요. 그런데도 정부는 계속 백화점이 갑이라고 하니…”

지난달 31일 공정거래위원회가 제정한 ‘대규모 유통업 분야 특약매입 부당성 심사지침’을 두고 백화점 업계 관계자가 내뱉은 하소연이다.

그의 말대로 백화점이 ‘갑’이던 시절은 그야말로 옛날 얘기다. 소수의 유통업체가 시장을 독점하던 시절, 백화점의 위상은 높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장은 급변했다. 아울렛, 복합쇼핑몰, 온라인과 모바일로 유통채널이 대거 확장되면서, 유통 강자로 굴림했던 백화점의 입지는 크게 흔들리고 있다. 입점업체들에게 더이상 백화점은 갑이 아니다. 실적만 봐도 알수 있다. 백화점의 영업이익률은 지난 10년새 약 10%에서 3~5%대로 떨어졌다.

하지만 공정위의 지침은 이런 현실과 괴리가 크다. 백화점과 입점 업체를 갑과 을의 관계로 무리하게 규정하기 때문이다. 개정안은 입점 업체의 자발적인 할인을 매우 제한적으로 해석한다.

입점 업체의 ‘자발성’이 인정받으려면 백화점은 할인행사를 기획하거나, 입접업자에게 요청해선 안된다. 입점업자가 백화점에 할인행사 실시를 요청한 공문이 있어도 자발적인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백화점 의사가 처음부터 끝까지 개입되지 않고, 다른 매장과 구분되는 차별성까지 갖춰야 자발적인 할인으로 받아들여진다.

이처럼 까다로운 경우가 아닌 대다수 할인행사는 입점 업체의 가격할인분을 ‘공동 판촉비용’으로 보고, 이를 백화점이 절반(50%) 이상 부담해야 한다는 게 이번 지침의 핵심이다.

백화점에서는 이를 ‘부담할 이유가 없는 돈’이라고 반박한다. 실제로 백화점이 입점 업체에게 일방적으로 할인을 강요한다면 공정위의 방침이 말이 된다. 그러나 대다수의 할인은 입점 업체의 자율적인 결정으로 이뤄진다고 업계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업체의 자발적 세일을 공동 판촉비용으로 볼 수는 없는 셈이다. 별도로 진행하는 TV 광고, 사은품 등 백화점 판촉비도 이미 상당한 수준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지난해 A라는 백화점에서 자체적으로 부담한 판촉비가 1조 400억원으로 납품업체가 부담한 400억원과 비교해 높은 수준을 보여왔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세일 가격 할인분까지 부담하라는 건 납득하기 어렵다”고 했다.

물론 세일로 입점 업체 매출이 늘면, 백화점이 받는 수수료도 늘어나는 측면이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해 백화점은 업체 계약시 정상 판매수수료율과 할인 판매수수료율을 달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정상상품 수수료는 27%, 세일·이월상품은 17%로 두 가지수의 계약을 맺는 것이다. 이와 함께 세일을 할 때는 할인율 10%당 수수료율을 1%씩 추가로 인하한다.

공정위는 이 마진 할인폭을 더 늘리라는 방침이다. 이에 백화점 업계는 ‘공정위 지침대로면 백화점은 세일을 할 이유가 없어진다’며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한국백화점협회는 공정위 지침이 원안대로 시행될 경우 백화점의 영업이익이 25%가량 줄어들 것으로 추산했다. 아예 세일을 하지 않을 때의 영업이익 감소폭인 7%보다 커, 할인 행사를 하는 게 더 손해가 된다. 그러다보니 1년에 4~5회가량 진행하던 백화점 정기세일도 없어질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당장 코리아세일페스타(코세페)부터 백화점 이름을 내건 가격 할인이 사라졌다. 롯데·신세계·현대·AK·갤러리아 등 주요 백화점의 행사 참여는 가격 할인은 일절 빠진, 사은품·경품 이벤트가 전부다.

공정위가 코세페에 찬물을 끼얹는게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자, 공정위는 지난달 31일로 예정됐던 시행일자만 내년 1월 1일로 연기했다. 업계 반응이 냉랭할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코세페 흥행 때문에 시행일자만 연기하는 정부의 탁상행정도 못마땅하지만, 무엇보다 입점업체에 할인행사 참여를 권하는 것도 갑질로 인식될 수 있다는 걸 우려한다.

할인을 통해 계절 상품 등 재고를 처리하는 입점업체도 백화점 세일이라는 홍보 효과를 보기 어려워졌다. 보통 세일에 참여하는 업체들은 국내 중소 브랜드가 많다. 전체 입점 업체 중 35~40% 가량이다. 반면 해외 명품 브랜드와 국내 프리미엄 브랜드는 ‘노(NO) 세일’을 고수하는 곳이 대부분이다. 이런 상황에서 할인 행사가 위축되면 백화점 차원에서 세일을 홍보하며 모객 효과를 노렸던 중소 업체들의 매출이 타격을 받을 수 있다. 공정위 조치로 수혜를 봐야할 업체조차 매출 우려를 떠안는 셈이다.

불명확한 할인 규정을 손 보는 일은 필요하지만, 유통업체와 제조업체를 무조건 갑과 을이라는 이분법적인 시각으로 봐서는 안된다. 정부의 과도한 규제와 탁상행정은 소비자, 백화점, 제조업체 모두에게 득이 될 게 없다. 백화점이 입점업체들에게 갑질하던 시대는 끝났다. 시대 변화에 맞는 정책 수립이 필요한 때다.

kula@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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