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역사의 피울음 간직한채…너의 ‘기개’는 여전하구나
‘선비의 고장’ 경북 영주·봉화
조선초 한수이남 최대 고을 순흥도호부
단종복위 도모하다 ‘정축지변’으로 폐부
고택 등 옛모습 그대로 보존된 ‘무섬마을’
만죽재 등 9개 전통가옥 민속자료로 지정
130여년간 후손들이 살고 있는 ‘만산고택’
흥선대원군·영친왕 등이 쓴 글씨 감상도
3면이 강으로 막힌 이곳에는 4가지가 없다고 한다. 농토, 우물, 대문, 감실(위패를 모셔놓는 사당). 둑이 생기기 전에는 홍수가 잦아 위패가 떠내려가는 경우가 많아 감실을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강물을 길어 먹었고, 농사는 외나무다리를 건너 마을 밖에서 지었다. ‘가마타고 들어와 상여타고 나간다’던 오지가 무섬마을이다. 사진은 드론으로 촬영한 영주 무섬마을 전경. [리에또 제공]
소수서원내 전시품중 흥미를 끄는 당시 유생들의 성적표.
무섬마을에 처음 터를 잡은 반남박씨 박수의 가옥 만죽재.
130여년 동안 후손들이 살고 있는 봉화 만산고택.

20~30년 전에 비하면 참 길이 많이 좋아졌다. 주말이면 답답하게 막히는 고속도로를 달리다 국도로 빠져 한참을 가야 닿을 수 있던 곳이 경북 내륙지역이었다. 여행이라도 갈라치면 비장한 마음을 먹어야 갈 수 있었고, 귀성이라도 하는 현지 출신사람들은 막히는걸 알면서도 참고 오가던 길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고속도로와 간선도로가 여기 저기 생기면서 지금은 전보다 한층 빨리 다다를 수 있게 됐다.

영주시와 봉화군도 그런 곳에 자리한 고장이다. 오래 전 학식높고 덕망있는 선비들이 터를 잡고 학문에 정진하거나 후학들을 기르던 곳들이 대부분 이런 곳에 있다. 그들의 삶을 일부라도 엿보고 싶다면 이 길에 오를 수 밖에 없다.

선비의 고장으로 불리는 영주는 역사적으로 커다란 아픔을 지닌 곳이다.

조선 초 순흥도호부로 불렸던 이곳은 한수 이남에서 가장 큰 고을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457년 순흥에 유배된 금성대군(세종의 6남)과 순흥부사 이보흠이 이웃 영월에 유배된 단종의 복위운동을 꾀하다 발각되면서 세조에 의해 이들은 물론 순흥 안씨가 멸문지화 수준의 참화를 입는다. 이때 화를 입은 사람들의 피가 죽계천을 붉게 물들였으며 10리 가까이 흐르던 피가 멈췄다하여 ‘피끝마을’로 불리던 곳이 지금의 영주시 안정면 동촌1리다.

순흥도호부는 이후 ‘역적의 고을’이라는 이유로 220년동안 폐부가 되었다가 1683년에야 다시 도호부가 됐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1907년에는 경북지역에서 맹활약한 의병 신돌석 이강년을 소탕한다는 미명하에 일본이 본국에서 군대를 끌고와 또 다시 영주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하지만 이런 고통스런 역사를 견뎌낸 영주의 전통과 문화는 여전히 묵직한 존재감을 과시한다.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 흔히 무섬마을로 불리는 이 곳은 태백산에서 흘러내린 내성천과 소백산에서 발원한 서천이 마을을 휘돌아나가 물위에 뜬 섬 같다고 해 무섬마을이라 불리게 됐다. 멀리서 바라본 모습이 안동 하회마을을 떠올리게 한다.

3면이 강으로 막힌 이곳에는 4가지가 없다고 한다. 농토, 우물, 대문, 감실(위패를 모셔놓는 사당). 둑이 생기기 전에는 홍수가 잦아 위패가 떠내려가는 경우가 많아 감실을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강물을 길어 먹었고, 농사는 외나무다리를 건너 마을 밖에서 지었다. ‘가마타고 들어와 상여타고 나간다’던 오지가 무섬마을이다.

수도리는 고택과 정자 등으로 이뤄진 전통마을로 옛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강을 따라 은백색 백사장이 펼쳐지며 맞은편에는 소나무, 사철나무 등이 숲을 이룬 나지막한 산들이 이어진다. 강 위로는 다리가 놓여져 마을과 마을을 잇고 있다. 관광객들의 포토존으로 유명한 이 다리는 양쪽에서 동시에 지나가기에는 좁아 중간 중간 비켜서서 기다릴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됐다. 깊지않아도 건너다보면 불안한 마음이 들지만 현지 사람들은 ‘전에 있던 다리에 비하면 한강다리 수준’이라며 튼튼하니 걱정말란다.

무섬마을이 생긴 건 450여년 전인 166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반남 박씨 박수가 이곳에 처음 터를 잡은 후 선성 김씨(예안 김씨라고도 함)가 들어와 박씨 문중과 혼인하면서 오늘날까지 두 집안의 집성촌이 됐다. 일제때는 100여가구 500명이 살기도 했지만 현재는 47채가 남아있으며 박수의 고택인 만죽재를 비롯해 9개 가옥이 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100년 넘는 고택도 16채에 이른다.

마을 내에 있는 ‘아도서숙(아시아 반도의 서당)’은 1928년 김락풍의 증손자 김화진 등 마을 청년들이 세운 공회당이자 교육기관으로 애국지사들의 활동거점이었다. 일제의 탄압으로 문을 닫았으나 증언과 사료를 모아 2015년 복원됐다.

또 ‘까치구멍집’이라는 전통가옥 형태도 직접 볼 수 있다. 남쪽이지만 겨울이 추운 영주지역 초가집들은 부엌 창고는 물론 외양간까지 실내에 들여놓은 구조다. 이때문에 환기 등의 이유로 용마루 양 끝을 뚫어놓았는데 이를 까치구멍이라고 한다. 기와집들은 경북 북부지역의 전형적인 양반집 구조인 ‘ㅁ’자형으로 지어졌다.

무섬마을에서는 2006년 ‘정월대보름 달집태우기’ 행사가 부활돼 열리고 있으며,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에 선정된 무섬 외나무다리축제도 열린다.

무섬마을에서 차로 40여분 이동하면 조선시대 서원의 효시이자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에 이른다.

1542년(중종 38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통일신라 당시 숙수사라는 사찰터였던 곳에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인 안향을 기려 위패를 봉안하고 이듬해 학사를 건립하면서 백운동서원으로 창건했다. 소수서원이라는 이름은 1550년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재임하며 건의해 사액을 받으면서 바뀐 것이다. 이곳에서 350여년간 4000여명의 유생들이 배출되었다.

사액서원은 나라로부터 책, 토지, 노비를 하사받아 면세, 면역의 특권을 가진 서원을 말한다. ‘소수(紹修)’는 ‘이미 무너진 교학을 닦게 하였다’는 뜻으로 학문 부흥에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데, 명종이 손수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글씨를 써서 하사하였다고 한다.

경내에는 강학당, 일신재·직방재, 학구재, 지락재, 장서각, 문성공묘 등이 있고, 안향 초상(국보 제111호), 대성지성문선왕전좌도(보물 제485호)등 유물과 각종 전적이 소장되어 있다. 또한 경내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사찰 숙수사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숙수사지당간지주(宿水寺址幢竿支柱, 보물 제59호)도 남아 있다.

조선 성리학의 문화유산인 서원은 선비들이 학문을 연마하고 선현에게 제향을 올리는 곳으로 향촌사회를 이끌어가는 정신적 지주 역할로 후에 지방유림세력의 구심점이 되었으며 나아가 중앙 정치세력의 견제 기반으로써의 기능을 갖게 되었다.

봉화는 영주에서 차로 1시간이면 닿는다.

봉화군 춘양면에 위치한 만산고택은 조선 말 문신으로 통정대부와 중추원 의관, 도산서원장을 지낸 만산 강용 선생이 지은 집으로 민속문화재이면서도 130여년간 후손들이 계속 살고 있는 고택이다.

고택체험객들도 들이기 때문에 보일러와 수세식 화장실 등을 설치했지만 전체적인 가옥의 형태는 그대로 유지보수해 원형을 해치지 않았다. 사랑채 앞에는 야생화 화분들이, 사랑채 대청과 칠류헌 대청에는 안주인이 직접 빚은 도자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전형적인 조선 사대부집으로 11칸의 행랑채와 솟을대문, 사랑채, 안채, 서실이 있고, 후원과 칠류헌 등은 담장으로 분리되어 있다.

사랑채와 붙어 ‘ㅁ’자형으로 안채가 뒤로 배치되어 있는데, 안채는 대청을 중심으로 안방과 상방, 부엌, 중방, 중방 남쪽으로 고방이 늘어서서 안마당을 둘러싸고 있는 구조로 이뤄져 있다.

만산고택에는 유독 현판이 많고, 글을 남긴 이들의 면면도 대단하다. 사랑채의 처마 아래에는 ‘晩山’(만산)과, ‘靖窩’(정와), ‘存養齋’(존양재)라고 쓴 현판이 걸려있다. ‘만산’은 흥선대원군이, ‘정와’는 소우 강벽원 선생이, ‘존양재’는 3.1운동의 33인 중 한 명이 오세창 선생의 글씨다. 서실에 걸린 ‘문필과의 밝고 깨끗한 인연’이라는 의미의 ‘翰墨淸緣’(한문청연)은 영친왕이 8세 때 쓴 글씨라고 한다. 칠류헌에 걸려 있는 오세창 선생이 쓴 ‘七柳軒’(칠류헌)이라는 현판에서는 요일이 순환한 듯 언젠가는 국운이 회복될 것을 염원했던 강용 선생의 국운회복의 열망을 읽을 수 있다. 칠류헌에는 중국의 군인이자 정치가였던 위안스카이가 쓴 소동파의 시도 걸려있다. 현재 만산고택을 지키는 강백기 선생은 “증조부가 조선왕실의 누군가를 통해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봉화에는 안동 만큼 고택이 많아 전통한옥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 많다. 만산고택을 비롯해 봉화군청에서 소개하는 곳만 14곳이며, 농촌체험마을도 10여곳에 이른다.

송이와 은어도 유명하지만 소설가 성석제의 글에 등장해 화제가 됐던 재미난 이름의 중국집을 들러보는 것도 독특한 경험일 것이다. 봉화군 춘양면에 있는 용궁반점의 볶음우동의 인기가 대단하고, 맞은편 펭귄반점은 짜장면을 잘한다고 하나 들러보지 못해 아쉽다.

영주·봉화=김성진 기자/withyj2@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