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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리즘] 52시간 근로제의 역설…더 높아진 정규직 문턱

요즘 소위 ‘출입처’ 분들을 만나 자주 나누는 대화가 있다. 상대는 주요 대기업의 임직원이다. 화두는 대기업 정규직의 높은 문턱이다. 우리 모두는 운(?) 좋게도 이 허들을 넘어 비교적 안정적이고 여유로운 삶을 영위하고 있는데, 과연 우리의 자식들도 이 허들을 넘어설 수 있을 지 자신할 수 없다는 게 대화의 골자다. 역설적이게도 이 허들이 노동자가 대우받는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 문재인 정부에서 더 높아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더해진다.

지난해부터 도입된 근로시간단축, 흔히 말하는 ‘52시간근로제’는 주요 공기업과 대기업 직원들의 삶에 일대 혁명을 가져왔다. ‘과로사회’를 해소하려는 정부의 ‘코드’에 부응하고자 주요 그룹은 다양한 근로형태의 도입, 기업 문화 개선 등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 근로시간 단축은 단순한 업무 시간의 감축에 그치지 않았다. ‘나비효과’는 상당했다. 업무 분위기가 변했다. 일과 삶의 균형을 뜻하는 ‘워라밸’은 일상이 됐다. 경직된 위계 질서에도 경종을 울렸다. MT로 불리던 불필요한 워크샵도 사라졌고 주 12시간의 합법적인 야근 마저도 되도록이면 피하려는 분위기가 지배했다. 물론 야근은 여전히 존재하고, 업무량은 동일한데 근무 시간만 줄었다는 푸념이 나오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근로시간단축은 ‘저녁이 있는 삶’을 법적으로 보장한 혁명적 조치와 다름 없다는 평가가 대세를 이룬다.

문제는 획기적으로 개선된 삶의 질을 누리는 수혜자가 여전히 주요 공기업과 대기업에 국한된다는 점이다. 내년 1월부터 50이상 300인 미만 사업장으로 확대된다 한들 대기업과 중소기업 근로자의 삶의 질이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낮은 영업이익으로 간신히 연명하는 국내 중소기업계의 현실을 감안할 때 줄어든 근무시간이 채용 확대로 이어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오히려 야근과 잔업 등으로 간신히 경쟁력을 유지하던 기업을 도산시키거나, 줄어든 야근 수당이 소득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

중소기업연구원이 최근 발표한 ‘근로시간 단축에 따른 중소기업 영향’ 연구 결과의 시사점은 이를 뒷받침한다. 연구에서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에 따른 신규인력 고용 여부에 대해 응답자 중 22.8%의 기업이 정부 지원이 있을 경우 신규고용에 나서겠다고 답했다. 정부지원과 무관하게 신규로 고용하겠다고 응답한 기업은 5.6%에 불과했다. 또 근로시간 단축 시 중소기업 기존 근로자들의 임금이 1인당 월평균 33만원 줄어들 것으로 예상됐다. 중소기업과 중소기업 노동자 모두에게 불이익이다.

글로벌 스탠다드를 지향하는 대기업에 속한 정규직 직원들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보호를 받는다. 생존 자체를 고민해야 하는 중소기업인에게 임직원의 ‘삶의 질’은 부차적인 문제일 뿐이다. 이 간극이 좁혀지기도 전에 이상론에 매몰돼 성급하게 도입된 제도들은 취업준비생들의 공무원·공기업·대기업 선호도를 더욱 높이는 부작용만 낳고 있다. 정부가 바라보는 노동자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노동자 모두를 아우른다. 하지만 두 노동자 사이에는 분명 노동의 형태, 임금, 복지 등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다. 이 현실을 인정한 토대 위에서 근로시간 단축과 괴롭힘 방지법 등의 제도가 도입되지 못한 건 두고두고 아쉬운 대목이다. s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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