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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봐, 거기” 알튀세르 ‘호명 이론’ 발원지를 드러내다
‘알튀세르 강의록’ 번역 진태원 교수
“인간은 전적으로 환경에 의해 규정”된다는
佛 18세기 급진사상가 ‘엘베시우스’에 주목
“인간, 끊임없이 이데올로기에 의해 재생산”
‘호명 이론’ 뿌리 관련 색다른 주장 첫 제기

“이익과 이기심은 인간 행동의 근본 지주이지만 부정적이고 한탄스러운 저주이기는 커녕 긍정적이고 이로운 지주
가 된다. 엘베시우스는 이런 급진적인 전도를 가장 멀리까지 밀어붙인 사람이며, 이익의 비관주의를 이익의 낙관주의
로 전환시킨 사람이다.”‘(알튀세르의 정치철학 강의’에서)

“이봐, 거기”

경찰관이 거리의 행인을 부른다. 행인은 그 소리에 뒤돌아서서 부름 받은 사람으로서 자신을 인식한다.

잘 알려진 알튀세르의 ‘호명(Interpellation)이론’이다. 개인을 부르는 권위적 목소리의 효과로서 주체는 종속되고, 주체는 이 종속과정을 거치면서 형성된다는 것이다. ‘호명 이론’은 현대철학, 특히 정신분석학에서 주체나 이데올로기를 거론할 때 자주 인용된다. 주디스 버틀러는 최근 번역된 ‘권력의 정신적 삶’에서 “호명 이론에서 부름은 법과 자신을 나란히 놓으려는 요구, 법을 마주하기 위한 돌아섬, 죄의식을 통한 자기귀속의 언어( “나 여기 있어요”)로의 진입으로 비유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알튀세르의 호명이론은 프로이트, 라캉, 스피노자 등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왔으나 18세기 대표적인 공리주의자 엘베시우스에게도 가 닿는다는 사실이 이번에 출간된 ‘알튀세르의 정치철학 강의’(후마니타스)에서 처음으로 드러났다.

알튀세르의 강의록을 엮은 이 책은 알튀세르가 생전에 저작에서 언급한 적이 없는 호명이론과 엘베시우스에 관한 얘기가 나온다는 점에서 관심을 끌 만하다.

강의록은 알튀세르의 타이핑 원고와 육필원고, 그리고 수강생 강의 노트에 의존했다. 마키아벨리, 홉스, 로크, 루소를 비롯, 몽테스키외, 콩도르세, 엘베시우스 같은 18세기 프랑스 정치철학자들, 그리고 헤겔과 마르크스 등 서양 근대 정치철학의 주요 사상가들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을 담고 있다.

이 강의록에서 화제의 인물은 단연 18세기 공리주의의 가장 순수한 대표자 엘베시우스다. 엘베시우스의 책 ‘정신의 대하여’는 파리 고등법원의 판결에 의해 1759년 2월10일 재판소 대계단 아래에서 불태워졌다. 그의 사유가 당시 사회에 얼마나 큰 충격파를 던졌는지 가늠케 한다.


알튀세르는 이 책에서 엘베시우스의 ‘정신에 대하여’를 언급하면서 엘베시우스의 도덕관을 꼼꼼이 들여다본다. 엘베시우스는 “인간들의 이기심에 화를 내는 것은, 봄의 소나기, 여름의 무더위, 가을의 비, 겨울의 얼음에 불평을 늘어놓는 것과 같다”며, 인간을 존재하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주장한다. 엘베시우스는 또 “이익은 피조물들의 눈앞에서 모든 대상을 변화시키는,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마법사”라고 설파한다. “들판에서 풀을 뜯는 양은 풀잎 사이에서 살아가는 잘 보이지 않는 벌레들에게는 공포와 경악의 대상 아니냐”라고 반문한다. 오히려 풀들의 관점에서 보면 사자나 호랑이는 양들에게 복수를 하는 이로운 동물이다. ‘상이한 이익의 관점’이 어떻게 대상을 변모시키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엘베시우스는 인간을 전적으로 우연적인 존재로, 환경에 의해 완전히 규정되는 존재로 이해한다. 또 누군가가 바보가 되거나 천재가 되는 일, 또는 미치광이가 되는 일은 모두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고 본다. 특히 인간은 어린 시절의 가정환경 및 사회 전체의 환경에 의해 규정된다. 따라서 교육의 문제가 결정적으로 중요성을 지닌다. 엘베시우스에게 교육은 인간 존재를 생산하고 변형하는 활동 일반으로서 확장된 의미를 얻는다.

알튀세르가 볼 때 엘베시우스의 이런 사상이 인간 생산의 역사로서 인간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준다고 본다. 인간의 발전이 환경에 의해 전적으로 규정된다면, 이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인간 자신의 역사에 의해 전체적으로 생산되고, 재생산되며 변형되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책을 번역한 진태원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선임연구원은 바로 이 지점에 주목한다. 엘베시우스 사상은 알튀세르 이데올로기론의 어떤 특성과 매우 유사한 면모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진태원은 책의 ‘옮긴이 후기’에서, “그것은 인간이라는 존재는 선험적인(경험과 독립적이며서 필연적인)본성을 지니고 있지 않으며,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이데올로기에 의해 생산되고 재생산되고 변형되는 존재라는 점이다”라 말한다. 알튀세르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호명’ 개념을 고안해 냈다는 것이다. 호명 이론은 인간은 그 계급적 정체성만이 아니라 그 개인적 실존에까지도 처음부터 끝까지 이데올로기에 의해 구성되고 재생산되고 변형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데올로기 바깥에서의 삶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엘베시우스의 반(反)자연주의적 인간학은 알튀세르 이데올로기론의 가능한 또 다른 원천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알튀세르의 ‘호명 이론’이 엘베시우스에게서 일정 부분 영향을 받았다는 진태원의 문제제기에 학계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 주목된다.

김능옥 기자/kn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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