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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리즘]‘구속’을 놓아주자
“이건 정상적인 재판이라고 보기 어렵다.”

30년 이상 재판업무를 해 온 한 법조인이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사건을 가리켜 한 말이다. 이 재판에서 ‘무더기 증인 채택’이 이뤄지기 전의 평가였다. 검찰 기록이 20만 쪽에 달하는데, 과연 피고인과 변호인이 짧은 시간에 다 읽을 수나 있겠냐는 지적이다. 수십명의 검사가 6개월 넘게 작성한 기록을 단기간에 파악하라는 건 불가능한 요구라는 설명도 곁들였다. “결국 이 재판은 조서를 증거로 쓰는 데 동의하지 않고 모든 걸 법정에서 다툴 수 밖에 없을 것”이라던 이 법조인의 예측은 들어맞았다.

검찰 조서를 위주로 재판하지 않고 법정에서 증인을 세워 일일이 혐의를 다투면 그만큼 시간이 오래 걸린다. 임 전 차장을 구속할 수 있는 시한은 5월13일로, 그 전에 판결이 선고되지 않으면 풀려난다.

돈 문제로 귀결되는 민사 재판에서는 당사자 사이의 다툼이고, 최대한 신속하게 권리관계를 확정해 줘야 한다. 판결이 빨리 선고되지 않으면 누가 돈을 줘야 하는지, 땅의 주인이 누구인지 불안한 상태가 계속 유지된다. 하지만 형사재판은 다르다. 누구를 처벌해야 하느냐를 따지는 것은 시급한 문제는 아니다. 판사는 피고인에게 형벌을 내릴지 여부도 판단해야 하지만, ‘실체적 진실’이 뭔지 파악할 의무도 진다. 그래서 민사재판과 다르게 재판장의 직권이 폭넓게 허용된다.

헌법과 형사소송법은 불구속 재판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구속은 수단일 뿐이고, 그 자체는 형벌이 아니다. 구속 기간은 나중에 형이 선고됐을 때 그만큼 형량에서 빠지기 때문에 조금 일찍 가둔다고 해도 ‘조삼모사’일 뿐이다. 하지만 피고인의 입장에서는 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느냐, 아니냐는 하늘과 땅 차이다. 증거인멸이나 도주의 우려가 있는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피의자가 구속되지 않으면 분노하고,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처럼 여겨진다. 영장전담 판사는 연예인만큼 유명세를 탄다. 정치권에서는 특정인의 구속영장이 발부됐느냐에 따라 연일 논평을 쏟아낸다. 구속은 수단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하면 과도하게 의미가 부여된다.

여기에는 법원의 잘못도 크다. 그동안 보석을 받아주는 데 매우 인색했고, 수사 단계에서 구속되면 풀려나기 어렵다는 인식을 심어줬다. 피고인이 풀려나면 큰일이라 여기고, 구속기간 만료 전에 선고하는 것을 철칙으로 삼았다. 풀려나기 어려운 환경을 토양 삼아 의뢰인에게 거액의 돈을 받아내는 '전관예우' 시장이 자라난 것은 덤이다. 이제 와서 이명박 전 대통령이나 임 전 차장 재판에서 ‘원칙’을 내세운다 한들, 사람들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원칙은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돼야 원칙이다. 필요에 따라 달리 적용된다면 그 자체로 ‘원칙’이라고 부를 수 없다. 전직 대통령이나 고위직 판사가 아니더라도 공정하게 헌법에 보장된 권리를 누리면 인식도 차차 바뀔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구속’을 구속하지 말고 놓아주자.

좌영길 사회섹션 법조팀장 jyg97@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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