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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대에 걸친 나라사랑…광야에서 새벽을 열다
여운형·안창호와 상해 임시정부 수립
손정도 목사, 임정 자금모금에도 헌신

선친의 유지 받들어 맨손으로 해군 창설
손원일 제독, 암흑에서 꿈 품고 미래 준비

“우리 민족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살아남은 세계 역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민족이다. 그 거대한 역사의 이면에는 수많은 민초와 모든 것을 바친 애국자가 존재했기 때문이다.(…)1919년 상해 임시 정부 수립에 기여한 손정도 목사의 애국심은 대한민국 해군 창설로 이어졌다.”(‘거대한 뿌리’ 머리말에서)

해방은 “느닷없이 도둑처럼 찾아왔다”는 어느 사상가의 말처럼 해방은 갑작스러운 일이었지만, 구한말 부터 일제강점기 기간 무수히 이어져온 항일과 독립을 위한 수많은 이들의 투쟁과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는 단지 수사가 아니란걸, 위대한 대한민국 시리즈로 나온 ‘거대한 뿌리’는 묵묵히 보여준다. 상해 임시정부 수립에 기여한 손정도 목사와 대한민국 해군을 창설한 그의 아들 손원일 제독의 삶을 오롯이 담아낸 책은 우리 근현대사로 읽어도 될 만큼 묵직하다.


손정도 목사는 유교 집안에서 자랐지만 기독교를 받아들이면서 삶이 송두리째 뒤바뀐다. 최초의 감리교 선교사 문요한을 만나 협성신학교를 거쳐 목회를 시작한 그는 가쓰라 암살음모조작사건에 연루돼 고문을 당하는 등 순탄치 않은 길을 걷게 된다. 동대문교회를 대형교회로 키운 데 이어 개신교 양대 교회인 정동 제일교회 담임목사를 맡으면서 그는 본격적인 항일운동과 연결된다. 당시 정동 제일교회는 이화학당, 배재학당을 끼고 있는 신문화의 중심이자 국제정세 정보가 교류되던 정보와 인적 네트워크의 중심이었다. 손 목사는 현손 목사를 통해 경운궁에 유폐된 고종을 만나 고종의 파리 강화회의 밀사 파견 계획에 길 안내자 역할을 맡게 된다. 고종의 갑작스런 승하와 밀사 하란사의 죽음 등이 이어지면서 이 프로젝트는 허무하게 끝나지만 손 목사는 여운형, 안창호 등과 함께 상해 임시정부를 세우고 의정원 의장(국회의장)으로 활동하게 된다. 상해임시정부가 정체성과 재정위기로 어려움을 겪던 시기에도 손 목사는 지병을 안고 안창호, 김구, 이시영 등 재건파들과 자금 모금을 나서는가하면 만주 한인을 돕는데 팔을 걷어붙인다. 길림에서 목회활동을 하면서 그가 가장 주안점을 둔 것은 한인들의 생활안정이었다. 그는 주식회사 형태의 한인경제공동체 농민호조사를 설립하는 등 애를 쓰지만 지병과 과로로 50세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뜬다.

부친의 부고를 아들 손원일은 원양 항해 중 듣게 된다. 당장 돌아갈 수 없었던 그는 대신 부친의 말을 속으로 되뇠다. 손 목사는 아들 원일에게 시대에 맞는 지식과 기술을 갖춰야 한다며, 이는 독립을 앞당기는 것과 같은 다름없으니 열심히 공부하라고 강조해 왔다. 상해에서 진로를 모색하던 손원일은 항해술을 배우면 좋겠다는 생각에 마침 장학금을 지급하며 입학을 장려하던 중앙대 항해과에 입학, 바다와 인연을 맺는다. 독일 원양어선 원양 항해사로 배에 올라 긴 여정을 마치고 중국으로 돌아온 그는 국영해운회사인 초상국의 연안화객선 항해사 겸 부선장으로 일하기 시작한다. 한달 휴가 중 누나 진실을 만나려 경성을 찾은 그는 상해 독립운동가들의 침투를 색출하는 데 혈안이 된 일제에 의해 누명을 쓰고 옥살이와 고문을 당한다. 무혐의로 풀려난 그는 몸을 추스린 뒤 매부 윤치창과 수입식품회사 남계양행을 열어 사업가로서의 수완을 발휘하게 된다. 이후 동화양행 텐진 지사장으로 부임한 그는 곧 ‘상해의 젊은 사업가’로 부상하게 된다.

광복의 소식은 상해의 사업을 정리하고 경성으로 돌아오던 단둥 역에서 듣게 된다. 그는 다시 손 목사의 말을 떠올렸다. “늘 걸레처럼 살며, 차별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라. 힘없는 민족은 언제든 나라를 빼앗길 수 있으니 힘있는 조국을 만드는 데 온 힘을 기울여라”.

그에게 국가적 소명은 해군을 창설하는 일이었다.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사재를 털어 해사대를 조직, 여운형의 요청대로 건국준비위원회에 들어가지만 실망하고 한 달 만에 탈퇴한다. 이후 일제가 선원후생복지기관으로 만든 조선해운보국단과 통합, 조선해사협회를 만든다.

해사협회는 미군정청의 해안 경비를 맡는 조건으로 해안 경비대 사령부와 해군병학교 설립(해사 전신)의 기회를 얻게 된다. 1945년 11월11일 해안 도시 순찰 임무를 수행하는 해방병단이 출범하고 1946년 1월 14일 비로소 정식 군사 조직으로 인정받게 된다, 해방병단 총사령관에 부임한 손원일은 사관교육과정을 수립하고 1946년 1월 17일 해군 병학교를 만든다. 반세기 만에 해군양성기관이 생긴 것이다. 1947년 정부 출범 뒤 해군 첫 제독으로 참모총장에 취임한 그는 1949년엔 해병대를 창설한다. 그는 무엇보다 전투함의 필요성을 절감, 봉급을 떼고 성금과 바자회를 통해 돈을 모아 전투함을 구입하는 등 국방력을 높이는데 남다른 집념을 보인다. 앞이 보이지 않는 암울한 상황에 매몰되지 않고 어떻게든 길을 내고 미래를 도모하는 모습에서 부자는 닮았다.

책에는 별처럼 빛나는 투사들의 이름 뿐만 아니라 잘 알려지지 않은 무수한 열사들의 이름과 단체, 군자금을 댄 이들까지 길게 등장한다. 이들의 삶과 활동을 꼼꼼이 기록해 독립운동사로 보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여기에 중국에서 축구왕으로 이름을 떨친 신국권,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비행사 권기옥 등 역사의 또 다른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이와함께 생생한 초기 해군의 모습, 손원일 제독이 이끈 해군의 6.25 전쟁사와 미국원조 및 약소국의 외교현장 얘기는 한 개인의 인생 여정과 겹쳐진 현대사의 주요 장면을 새로운 각도로 들여다보게 한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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