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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 칼럼] 누가 나를 위로해주나
지난 주말, ‘국민예능’으로 자리잡은 ‘미운우리새끼’ 재방송을 보다가 시쳇말로 빵 터졌다. 스페셜MC로 배우 배정남이 출연해 구수한 사투리와 넉살로 ‘모(母)벤져스’를 사로잡았는데, 배우 강동원과 16년 절친이라는 말에 다들 호기심이 일었다.

배정남은 스무살에 서울로 올라와 처음 본 사람이 강동원이었다며, 그렇게 잘 생긴 사람은 처음 봤다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와~ ‘베르사이유 장미’ 만화 봤습니까. 만화에서 튀어나온 사람 있잖아요? 서울아들은 다 이래 생겼나. 살다살다 이렇게 잘 생긴 사람 처음 봤습니다”며 과장스레 얘기하는데, 문제는 ‘베르사이유 장미’였다. 어머니들 반응이 시원찮았는데, 신동엽이 끼어들어 설명을 보탰지만 칠십이 넘은 어머니들이 ‘베르사이유의 장미’가 어떤 장미인지 아는 것 같진 않았다. 그래도 어머니들은 오랜 연륜으로 그게 무엇이든 앞뒤 맥락을 보아 잘 생겼다는 의미로 곧장 이해했다. ‘만찢남’을 설명하려다 튀어나온 어색한 ‘베르사이유의 장미’에 그만 웃음이 났다. 그리고 알았다. ‘아, ‘베르사이유의 장미’를 남자들도 보는구나.’

‘베르사이유의 장미’는 80년대 수능을 보고 난 여고 교실에 일대 파란을 일으킨 만화였다. 수능이 끝난 뒤, 3학년 교실은 각종 교양강좌나 자습시간으로 채워졌는데, 만화열기가 뜨거웠다. 누군가 가져온 이 만화를 책상 밑에 놓고 돌려가며 정신없이 봤던 기억이 생생하다. 아이들은 남장한 아름다운 근위대장 오스칼에 매료돼 침이 말랐다.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한 만화는 어린시절 봤던 만화와 딴판이었다. ‘베르사이유 장미’와 쌍벽을 이루며 교실을 휘저어놓은 만화는 ‘캔디’였다. 테리우스, 안소니, 스테아에 여자들은 패가 갈렸다. 캔디는 순정만화지만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는 밝고 건강한 캐릭터로 오래 사랑 받았다. 힘들 때마다 돌아가 위안을 얻는 ‘포니의 언덕’은 따뜻한 위로의 공간으로 아이들의 마음속에 자리잡았다. 캔디 못지않게 사랑받은 씩씩한 캐릭터가 빨강머리 앤이다. TV애니메이션을 보며 유년시절을 보낸 30대들에게 앤은 무한긍정의 화신이다.

백영옥 작가의 책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이 베스트셀러로 화제가 되던 때, 카페 옆자리에서 여성 둘이 하는 얘기에 절로 귀기울인 적이 있다. 30대 초중반 정도로 보이는 둘 중 한 명이 상대에게, 빨강머리 앤을 다시 보고있는데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며, 말하면서도 계속 울먹였다. 아이와 집안일에 매달려 허둥대다 보니 꿈은 온데 간데 없고 스스로 너무 한심했는데, 앤을 보면서 자신을 돌아보게 됐다는 거였다.

만화나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들이 주는 추억의 소환효과는 즉각적이고 강력하다. 세상은 아직 저멀리 있고 모든 것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유년시절, 함께 보낸 캐릭터를 잊고 있다가 어른이 돼 만나면 세월의 간극에 놀라게 된다. 특히 세상이 나만 밀어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면 더욱 울컥해지게 마련이다.

올 한해 가장 많이 팔린 책이 ‘곰돌이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라고 한다. 팍팍한 현실과 불황에 위로받고 싶은 이들이 많다는 얘기다.

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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