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상에서 만나요(정세랑 지음, 창비)=소설 ‘이만큼 가까이’‘피프티피플’의 작가 정세랑이 작품활동 8년만에 첫번째 낸 소설집. 발표 당시 파격적 형식과 지금의 현실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로 SNS상에서 화제를 모았던 ‘웨딩드레스 44’를 비롯, 아홉편의 작품을 묶었다. 신선한 상상력과 다정한 문장이라는 정세랑 표 소설의 맛을 톡톡히 즐길 수 있다. 표제작 ‘옥상에서 만나요’는 직장에서 부조리한 노동과 성희롱에 시달리며 늘 옥상에서 뛰어내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는 ‘나’가 회사 언니들의 주술비급서를 물려받고서 마침내 절망에서 빠져나오는 이야기다.

여기에도 ‘피프티피플’에서의 연대가 바탕에 깔려있다. 같은 드레스로 연결된 44명 여성의 목소리를 담은 ‘웨딩드레스 44’는 한벌의 드레스를 빌려 입고 결혼한 혹은 결혼할 여성들의 이야기로 44개의 짧은 에피소드 형식이다. 낭만이 아닌 제도로서의 결혼을 생생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이 작품에는 다양한 여성 서사가 등장한다. 특히 이 드레스를 마지막으로 입은 여성이 고등학생들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직장에서 고군분투하는 여성의 목소리를 담은 ‘이혼 세일’ 등 동시대의 다양한 여성의 모습이 정세랑의 독특한 감수성으로 입체감을 드러낸다.

▶소녀와 여자들의 삶(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문학동네)=2013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앨리스 먼로의 유일한 장편소설. 먼로는 1968년 첫 소설집 ’행복한 그림자의 춤‘부터 2012년 마지막 작품 ’디어 라이프‘에 이르기까지 캐나다의 작은 마을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왔다. 그중에서도 여성, 소녀들의 삶에 주목했고 그들의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왔다.

먼로의 자전적 소설로 불리는 이 소설의 배경은 40년대 온타리오주의 작은 타운 주빌리. 주인공 델 조던은 집요한 호기심과 남다른 감수성으로 주변사람들을 면밀히 관찰한다. 그의 관심권안에 들어온 첫 여성은 딸 하나를 둔 미혼모인 메들리.보호자인 오빠에 의해 베니 아저씨와 강제 결혼한 그녀는 폭력적이며 아내역할을 다하지 않는다. 당시의 기준으로 보면 비교적 독립적이고 깨어 있는 의식의 소유자인 델의 엄마도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백과사전을 팔러 다니는 엄마는 딸들에게 여자들에게도 삶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강조하지만 델은 엄마의 말에 거부감을 느낀다. 엄마의 대척점에는 가부장적 시스템에 안주하는 대고모들이 있다. 남자의 일과 여자의 일 사이에는 분명한 선이 있다고 믿는 이들이다. 또 다른 부류의 여성들도 등장한다. 결혼은 하지 않은 채 오페라를 듣고 춤을 추러 다니고 연애를 하는 도허티, 결혼을 목표로 하는 나오미 부류의 여성 등 다채로운 여성들이 등장하지만 작가는 이들 어느 편을 들지 않고 스케치하듯 그려나간다. 

▶나의 삶은 서서히 진화해왔다(찰스 다윈 지음, 이한중 옮김, 갈라파고스)=‘종의 기원’으로 지적 혁명을 일으킨 진화론의 창시자, 찰스 다윈의 자서전. 자연과학자로서 살아온 삶을 직접 기록한 것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 6년여동안 삶의 궤적을 회상하며 썼다. 온갖 사물을 관찰하고 수집했던 어린시절부터, 우연한 기회에 비글호를 타고 떠난 5년여의 탐사 여정, 이후 찾아든 신앙에 대한 회의, 생태계의 변이에 대한 탐구로 진화론을 낳기까지 과정을 담담하게 술회했다. 자연과학을 넘어 인류사의 사고체계에 일대 혁명을 가져온 발견이지만 그는 환대 대신 모욕을 당했고 조롱받았다. 오랫동안 유럽사회를 지탱해온 종교적 사회질서을 뿌리채 흔들어놓은 일종의 혁명이었기 때문이다. 사후 5년이 지난 뒤 나온 자서전도 제모습대로 나오지 못했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고려해 다윈의 명성을 보호하려 가족들이 너무 논쟁적인 구절은 뺀 탓이다.

‘종의 기원’은 출간 100주년인 1959년에 이르러서야 온전한 모습으로 출간됐다. 도자기 회사로 유명한 웨지우드 가문의 아내 엠마 웨지우드와 자식들을 향한 깊은 사랑 등 평범한 가장의 모습도 담았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