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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리즘] 이런 전시를 보고 싶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좁고 어두운 통로를 따라 들어가는 길. 귓가엔 쏟아지는 물 소리만 가득하다. 검은 장막을 걷고 들어가니 전시장에 비가 내리고 있다. 온통 검은 방, 입구 맞은편에 스포트라이트 하나 만 켜져있다. 용기를 내서 빛을 향해 한 발 내딛자, 내 주변만 비가 내리지 않는다. 사방 1미터나 될까, 고개를 들어 천정을 보니 그 부분만 물이 나오지 않는다. 갑자기 신이나기 시작했다. 달려 볼까, 팔을 벌려 볼까, 점프 해 볼까. 폭우 속에서도 젖지 않는다니 누군가의 말 처럼 ‘신이 된 것’ 같았다.

이 작품은 아티스트 그룹 랜덤 인터내셔널(Random International)의 설치작이다. ‘레인 룸’(Rain Roomㆍ2012)은 인체 온도를 감지하는 센서를 활용해 비가 쏟아지는 방안에서 관람객들이 젖지 않고 돌아닐 수 있다. 2013년 뉴욕현대미술관(MoMA)에 설치됐을 당시 관람객들이 3~5시간 기다리는 진풍경을 낳기도 했다. 이후 LA카운티뮤지엄과 런던 바비칸센터에서도 폭발적 인기를 누렸다. 인스타그램에 ‘#rainroom’을 검색해 보면 5만6000개가 넘는 게시물이 올라와 있다. 지금은 중국 상하이 대표 미술관인 유즈미술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밖에 붙은 포스터만 보아도 이 작품의 작동 원리나 컨셉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레인룸은 보이는 것 이상의 경험을 선사한다. 빗속을 걸어 다니다 보면 학생시절 친구들과 장대비를 맞으며 뛰어가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 공기, 냄새, 소리가 영화의 회상장면처럼 밀려왔다. 누구나에게 있을 비와 연관된 기억이 작품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영리하기 그지없다. 현대미술이 어렵다고 하지만 또한 이렇게 쉽다. 그리고 이렇게 즐겁다.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씁쓸함이 몰려왔다. ‘우리는’ 이라는 단어 때문이다. 한국에서 이런 전시가 과연 가능할까라는 의문이 들어서다.

미술관계자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다. ‘현대미술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미술은 삶을 풍요로롭게 한다’는 말이다. 미안하지만 이들은 구호다. 당위는 감동을 줄 수 없고, 감동이 없이는 행동을 끌어낼 수 없다. 미술관들이 관객과 거리를 좁히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지만, 이렇게 큰 전시, 즉 ‘한 방’이 필요하다.

그래서, 국내 대표적인 현대미술관인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이런 전시를 만나보고 싶다. 현대미술이란 이런 것이라고, 어렵지 않고, 이렇게 신나고, 우리 삶에 있는 것이라는 걸 알려주는 전시 말이다. 맨날 만나는 선생님들의 전시, 작가 개인의 예술세계를 들여다보는 전시 말고.

지금은 차기 국립현대미술관장 공모절차가 진행중이다. ‘한국미술의 정체성 확립에 초점을 둬야한다’는 문체부의 기조 때문일까. 후보로 거론되는 분들은 국내 미술계에서 ‘어른’으로 평가되는 인사들이다. 후보자들의 나이도 60대 후반~70대 초반이다. 개개인의 역량과 능력도 중요하지만 제발, 파격적이고, 실험적인 행보를 장려하고 용납할 수 있는 관장이 오길 바란다. 국립 ‘현대미술’관이니까.

vicky@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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