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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 광장-강태은 프렌닥터연세내과 비만클리닉 부원장] 대한민국 수험생 엄마의 편지
새벽 5시. ‘따르릉!’ 천둥 같은 알람과 함께 아침이 시작된다. 모두 잠든 시간, 양파를 썰고, 고기를 굽고, 야채를 삶는다. 고백컨대 결혼 23년차, 16만시간 이상 ‘주부’란 명찰을 달았건만, 졸다가 가위에 칼에 손가락을 베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엄마의 밥보다 셰프의 요리를 훨씬 좋아하는 아들이 먹기 싫은 속내를 감추며 “엄마 자꾸 손 다치니까, 그냥 더 자, 난 귤만 먹고 가도 돼”라는 말을 반복하지만, 새벽 밥상은 필자에게는 아들과 공유하고 싶은 ‘천국의 놀이터’다.
36개월 즈음, 노란 어린이집 버스를 타고 “엄마, 안녕”하며 사회에 첫 문턱을 내딛던 감격이 아직도 생생한데, 이제는 그 아들이 통학 버스를 번쩍 들 것처럼 성장했다. 아들과 소통 욕심에, 초등학교부터 중학교까지 9년의 시간을 함께 걸어 등교했던 우리 모자는 참 추억이 많다.
아들의 안전한 등교를 위해 함께 걷던 아침은 서로 앞 지퍼를 올려주며 “엄마, 멋 좀 그만 부리고 따뜻하게 입어”라고 정다운 잔소리를 나누는 아침이 됐다. 아들이 중학생이 됐을 때에도 “왜 아침마다 따라 나서는 거야”라고 서로 토닥대며 우리는 아들의 학창 시절, 9년의 아침을 함께했다.
누가 들을까 창피한 서로의 실수담으로 깔깔거리다 지각하고, 수수깡을 사느라 지역 문방구를 싹 뒤지기도 했다. ‘받아쓰기 100점 한 번 맞아 보자’며 허공에 글씨를 쓰다 녹색 신호등을 놓치고, 속상한 속내를 집요하게 캐묻는 질문에 짜증과 후회를 반복했다. 그렇게 등굣길 토닥거린 수많은 날들은 ‘적어도 아침만은 서로 웃으며 시작하기’를 암묵적으로 약속하게 했다.
그렇게 성년이 지나 현재 재수를 하는 아들, 필자의 아침은 여전한 설렘이다. “나 같은 아들이 있어서 감사하지? 내가 너무 모범적이면 엄마가 얼마나 재미없겠어? 가끔 사고도 치고, 해결도 해 주고, 그러면서 엄마의 경험도 쌓고. 자식 키우는 맛이 있잖아.” “그래, 하루하루가 지독하게 재미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정말 아들의 말이 맞는 것이 아닌가. 아들을 통해 필자는 ‘지혜롭고 강인한 엄마’로 급성장 중이다. 뛰다가 학교 현관 유리를 박살낸 덕에 강화유리 견적도 내 보고, 상처를 꿰매는 아들을 붙잡고 ‘마스카라 눈물’도 흘려 봤으며, 담임 선생님에게 ‘아들 교육을 잘못시켰다’며 반성문도 써 봤다. 화장실 문으로 장난치다 친구와 함께 앞니를 다쳐 친구 아들 이를 치료하며 다양한 치과 세계의 ‘땜빵 재료’도 알게 됐다.
그리고 이제, 재수생 엄마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삶을 훈련하는 중이 아닌가. 아들 덕분에 필자의 삶은 해마다 화려하게 채색되고 있다. 1등만 하고, 이불 잘 개고, 빨래 잘 벗어 두고, 학교에 초청받는 일만 있는 다른 아들 엄마의 삶이었다면, 필자의 감성이 이토록 풍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재수생 엄마로 살아온 지 어언 1년. 이제 수능도 코 앞에 뒀다. 절망이 있었지만, 절망 속 희망을 볼 줄 아는 혜안이 있었기에 아들의 재수생활 1년이 더없이 행복했음을 고백하며, 늦기 전 대한민국 수험생 엄마를 대표해 아들에게 보내는 감사 편지를 공개해 보련다.
첫째, 하마터면 ‘딸’에 머무를 뻔한 엄마의 삶에 아들로 찾아와 줘 철든 어른이 되게 해 줘 감사하다. 둘째, 함께할 수 있었던 선물 같은 1년을 통해 행복은 결국 가족으로 귀결됨을 다시금 깨달았다, 드러내고 싶지 않던 모난 엄마의 모퉁이들이 하나둘 치유돼 감사하다. 셋째, 최고 경영에서 궁극의 진리 ‘러브 더즈(love does)’를 드디어 깨달았다. 괜찮은 엄마가 되기 위해 노력하면서 사랑이야말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을 몸소 배울 수 있었다. 넷째, 때로는 비참해 다 내려놓고 싶은 삶의 마디마다 포기하지 않도록 손을 꼭 잡아줬던 네게 감사하다. 다섯째, 세상에 한창 물들 30대와 40대에 다가와 동화 같은 20년의 시간을 살게 해 줘서 감사하다.
마지막으로 엄마도 당부하련다. 앞으로는 삶이 힘들 때 작년처럼 억지로 웃으려 애쓰지 않았으면 해. 언젠가 너도 아빠가 되면 아내에게 자식에게 강한 모습만 보이고 싶을 거야. 그때 잠시 들러 “쉬다 갈게”라고 잠 한 번 편히 청할 수 있는 따스한 엄마가 되도록 노력할게. 아들아, 너를 키우면서 많은 것을 네게 줬다고 생각했는데 받은 것이 더 많네. 이제는 엄마가 갚아 가려고 한다.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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