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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장에서] 수사만능주의
2016년, ‘최순실-박근혜 게이트’가 터지기 전까지 검찰이 벌인 가장 큰 수사는 롯데 경영비리 사건이었다. 6월부터 10월까지 4개월 동안 그룹에 대한 전방위 수사에 나섰고, 신동빈(63) 회장에게는 1249억 원대 배임과 508억 원 횡령, 신격호(96) 총괄회장에겐 858억 원의 증여세를 탈루한 혐의를 적용했다. 기소단계 범죄액이 수천억 원에 달했고, 검찰은 “심각한 수준의 기업 사유화와 사금고화 행태 등 불투명한 재벌 지배 구조의 폐해를 확인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2년이 지난 이달 초 롯데 경영비리 수사팀의 성적표가 나왔다. 항소심에서 신동빈 회장은 롯데시네마 매점에 영업이익을 몰아줬다는 일부 배임 혐의만 유죄로 인정됐을 뿐, 주된 혐의인 불법 급여 지급에 따른 횡령이나 ‘롯데피에스넷’ 지분인수 과정에서의 배임 혐의는 모두 무죄가 나왔다. 신격호 회장 역시 가장 큰 혐의인 조세포탈 혐의에 무죄가 선고됐다. 지난 12일에는 비자금을 조성하고 회삿돈을 빼돌린 혐의로 기소된 하석주(60) 롯데건설 대표이사도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마찬가지로 조세포탈에 관여한 부분만 유죄가 나왔고, 주된 혐의인 302억 원 횡령은 무죄로 결론났다. 대법원은 법리만을 따지는 법률심이기 때문에, 항소심 선고 내용이 최종 결론이 될 가능성이 크다. 2년 전 “적발된 전체 범죄금액이 3755억 원에 이른다”고 발표했던 검찰로선 머쓱한 결과다.

굳이 롯데그룹 수사를 언급하는 이유는 검찰 기획 수사의 폐해를 잘 보여준 사례이기 때문이다. 일본 산케이신문 베테랑 법조 기자였던 이시즈카 켄지는 도쿄지검 특수부의 몰락을 담은 저서 ‘특수붕괴’에서 검찰이 자체적으로 벌이는 기획수사의 문제점을 ‘퇴로가 없다’는 말로 요약했다. 검찰이 유명인사나 대기업을 상대로 강제수사에 착수하면 ‘수사해보니 혐의점이 없더라’고 물러서는 게 불가능하고, 결국 무리한 수사로 이어질 위험이 크다는 지적이다.

롯데그룹 수사의 초점도 계속 바뀌었다. 처음에는 정책본부의 수백억 원대 비자금 조성 의혹을 밝히려고 했지만, 급여와 배당금을 쌓아둔 것이라는 해명을 깰 증거를 찾지 못했다. 계열사 압수수색을 통해 롯데케미칼이 일본 업체와의 거래 과정에서 ‘통행세’ 명목으로 수백억 원을 빼돌렸다는 내용에 관해 수사를 벌였지만, 일본 현지 협조가 안돼 마찬가지로 난항을 겪었다.

하지만 일본 도쿄지검 특수부처럼 수사에 퇴로는 없었다. 검찰은 롯데건설이 조성한 부외자금을 비자금으로 규정하고 임원진 2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위에서 시켰다’는 진술을 받아내면 총수 일가를 공범으로 기소할 수 있었지만, 법원에서 영장이 기각됐다. 수사 막판에는 롯데그룹 조세 자문을 했던 대형 로펌을 압수수색하는 무리수를 뒀다. 법률자문을 맡은 로펌을 강제수사해 혐의점을 찾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이다. 의뢰인의 비밀유지권을 침해했다는 변호사 업계의 비판이 이어졌다. 일단 기업 수사를 시작하면 총수까지는 가야 한다는 검찰의 고정관념을 잘 보여준 사례였다.

지난해 임명된 문무일 검찰총장은 검찰이 직접 수사에 나서는 사건을 줄이고, 업무의 중심을 수사 과정의 인권 침해 요소를 통제하는 방향으로 전환하는 것을 개혁 과제로 내세웠다. 하지만 최대 규모 일선 청인 서울중앙지검 특수부는 여전히 몸집을 불리고, 쉴새 없이 대형 기획수사를 벌이고 있다. 지금이야 ‘적폐청산’을 기치로 명분이 있는 수사를 벌이지만, 검찰권이 남용될 위험은 현존한다.

“검찰은 무리한 기소를 하고도 책임지지 않고, 결과와 관계없이 인사를 통해 보상 받는다, 우리나라 검찰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이 수사권과 기소권을 함께 가지고 있는 조직이다.” 7년 전인 2011년 11월, 서울 마포구에서 열린 ‘검찰개혁 북 콘서트’에 참석한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의 말이다. 대통령이 된 지금도 같은 검찰 개혁 의지를 가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정부가 내놓은 검·경 수사권 조정안에서 검찰의 직접 수사기능은 조폭이나 마약 범죄 정도만 제외됐을 뿐, 거의 그대로 유지됐기 때문이다.

법원 판결을 통해 주된 공소사실이 대부분 깨진 지금, 2년 전 롯데그룹 수사가 어떤 의미인지 의문이 든다. 수사권 조정은 국회 입법을 기다려야 하지만, 사회부조리를 형사처벌로 해결하려는 ‘수사 만능주의’를 깨는 인식 전환은 지금이라도 가능하다.

jyg97@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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