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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재연의 외교탐구] 北ㆍ美 ‘리비아 모델’ 신경전과 커지는 중매외교 딜레마
[헤럴드경제=문재연 기자] ‘리비아식 비핵화’가 도대체 뭐길래 이 난리인 것일까. 일반적으로 ‘선(先) 핵폐기, 후(後) 보상’의 비핵화 방법론으로 알려진 리비아식 모델은 어느덧 서방에 의한 정권 전복사례로 포장됐다. 

하지만 ‘리비아식 모델’을 둘러싼 북미 간 신경전은 이보다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북한과 미국이 말한 ‘리비아식 모델’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해야 오는 6월 열릴 북미 정상회담의 앞두고 흘러가는 판세를 읽을 수 있다. 

▶‘리비아모델’을 언급하며 ‘CVID’를 거부한 北=
지난 16일부터 한반도 정세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김계관 북한 외무성 제1부상이 개인 담화를 발표하며 ‘북미회담 재고려’를 언급했다.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그림=문재연 기자/munjae@heraldcorp.com]

알려진 것과 달리 북한은 ‘리비아식 모델’만 부정한 것이 아니다. 본문 자체를 보면 CVID까지 부정하고 있다. CVID나 리비아식 모델, 아울러 선 핵포기 후 보상 방식과 같이 미국이 주장하는 까다로운 비핵화 방식을 ‘대국들에게 나라를 통채로 내맡기고 붕괴된 리비아나 이라크의 운명’으로 이끄는 방식이라고 표현했다. 

북한이 ‘CVID=미국에 나라를 통채로 내맡기고 붕괴하는 운명’으로 인식하고 그 대표적 사례가 리비아의 비핵화 과정이라고 상정한 것이다. 물론, 2011년 카다피 정권이 붕괴한 직접적 원인은 비핵화 과정도 아니요,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ㆍNATO)와 미국의 공습도 아니었다. 카다피 정권이 붕괴한 직접적 원인은 아랍에서 분 ‘아랍의 봄’이라는 민주화 물결이었다. 

결국 리비아의 비핵화과정은 북한에 있어 한미가 제공할 수 있는 안전보장조치로는 내부 개혁물결을 저지할 수 없다는 사실이 확인된 사례로 꼽힌다고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북한은 내부 주민들에게 ‘핵있는 평화’와 ‘정상국가 이미지’를 동시에 어필함으로써 체제 안정을 도모하는 ‘선(先) 체제보장 후(後) 비핵화’를 강조한다. 

[사진=로이터 연합]

이같은 북한의 인식은 14일 국회에서 태영호 전 영국주재 북한 공사가 ‘3층 서기실의 암호’ 출판간담회에서 한 발언에서도 드러난다.

태 전 공사는 “CVID는강제사찰, 무자비한 접근이다. 이걸 해야지만 진정한 핵폐기가 가능하다”며 “하지만 김정은(북한 국무위원장을)을 하늘처럼 절대화하는 사회에 외부세계가 들어가 보고 싶은 곳, 의심되는 곳을 샅샅이 뒤지는 건 곧 북한의 가장 권력 핵심요소이고 근간인 수령구조를 붕괴하겠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결국 CVID는 북한이 체제보장으로 직결되는 ‘최고 존엄’을 철저히 짓밟는 절차라는 것이다. 

과거 북한과의 협상을 주도했던 우리 당국자들이 남긴 회고록에서도 ‘체제보장’을 우선시하는 북한의 인식을 확인할 수 있다. 2000년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비밀리에 만나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켰던 임동원 당시 국정원장(현 한반도평화포럼 명예 이사장)은 자신의 회고록 ‘피스메이커’에 “북핵문제는 미북 적대관계의 산물”이라며 “미국은 적대관계를 해소하고 북한과의 관계를 정상화해나가야 한다. 평화를 보장하고 핵무기를 필요하지 않는 안보환경과 여건을 조성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북한은 ‘선(先) 체제보장 (後) 핵폐기’로 가야지만 실질적인 핵폐기를 할 수 있을 것이란 주장이다. 

결국 14일 이뤄진 김 제1부상의 개인담화는 미국이 요구하는 CVID와 핵폐기를 넘어선 인권문제, 대량살상무기(WMD) 폐기 등에 대한 북한의 반발로 이해할 수 있다.

▶美트럼프와 볼턴이 말한 ‘리비아 모델’은 달랐다=
리비아 모델에 대한 북한의 반발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17일(현지시간) “리비아 모델은 꽤 다른 모델이다”며 “리비아 모델은 우리가 북한에 대해 생각하는 모델이 아니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이같은 발언을 두고 북한이 원하는 입장을 모두 수용하고 달랬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트럼프 대통령이 ‘대북 강경파’로 꼽히는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대북정책 결정과정에서 배제하기 시작했다는 분석도 나왔다. 하지만 볼턴 보좌관의 그동안 인터뷰 내용 전문과 백악관이 공개한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 전문을 비교대조해보면 둘이 말한 ‘리비아 모델’은 전혀 다른 취지에서 나온 것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은 볼턴 보좌관이 지난달 29일(현지시간) 미국 폭스뉴스채널과 CBS방송 ‘페이스 더 내이션’과의 인터뷰에서 한 발언이다. 

[그림=문재연 기자/munjae@heraldcorp.com]

폭스뉴스 채널의 인터뷰 녹취록을 보면 볼턴 보좌관은 발빠른 비핵화의 사례로 리비아를 들었다. 실제 리비아의 핵폐기는 단 9개월 만에 이뤄졌다. 2003년 리비아의 카다피 정권이 핵무기를 비롯한 모든 대량살상무기(WMD) 개발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이후, 2004년 1월까지 리비아는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에 가입하고 핵무기 설계정보와 핵무기 및 미사일 프로그램과 관련된 주요 장비ㆍ문서를 미국에 전달했다. 이후 2005년 10월까지 핵무기 프로그램 완전 폐기를 이행했다. 9개월 만에 CVID의 절차가 모두 마무리된 것이다. 

볼턴은 인터뷰에서 “북한과 리비아의 상황이 다르다”면서도 리비아 모델을 참고하겠다는 의미에서 이같이 발언했다. 

볼턴 보좌관이 CBS방송 ‘페이스 더 내이션’과 진행한 인터뷰에는 더 중요한 발언이 나왔다. 

[그림=문재연 기자/munjae@heraldcorp.com]

볼턴 보좌관은 CBS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리비아 모델이 비핵화의 ‘모범사례’가 되는 이유가 미국과 영국 사찰단 혹은 참관단의 사전 핵시설 사찰을 허용에 있다고 명시했다. 

당초 리비아의 핵폐기 과정은 1단계: 핵무기 설계정보 및 미사일 프로그램 장비 및 문서 미국 이전 → 2단계: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포괄적 사찰 및 핵물질 반출 → 3단계: 핵시설 폐쇄 및 핵무기 폐기프로그램 마무리 등 3단계를 거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볼턴 보좌관은 “리비아는 미국과 영국 사찰단의 핵시설 출입까지 허용했다”며 리비아의 철저한 정보공개가 비핵화의 모범사례로 꼽히는 근거라고 제시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언급한 리비아 사례는 ‘정권 붕괴’에 맞춰져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옌스 스톨텐베르크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 사무총장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그림=문재연 기자/munjae@heraldcorp.com]

앞서 언급했지만, 카다피 정권이 붕괴한 직접적인 원인은 미국의 리비아 침공은 아니었다. 리비아가 비핵화를 한 지 6년 뒤는 2011년 전개된 ‘오디세이 새벽’ 작전은 카다피 정권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와 정전을 선언한 다음날 바로 대규모 민간인 대학살을 감행하면서 시작됐다. 미국의 무력개입을 골자로 한 안보리 결의안에 중국과 러시아는 이례적인 기권까지 했다. 

[사진=AFP연합]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대통령은 리비아 모델이 ‘완전한 초토화’(total decimation)였다며, “만일 우리가 (비핵화에) 합의하지 않으면 그 모델이 발생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비핵화 방식이 아닌 ‘미국의 무력개입’에 의미를 부여한 발언이다. 이 때문에 외신은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에 경고를 날렸다”고 풀이했다. ‘좋은 말할 때 협상테이블에 나오지 않으면 체제보장은 없을 것’이라는 협박성 메시지를 보냈다는 것이다. 

실제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이 비핵화에 합의하면 김정은 정권의 체제를 확실히 보장하겠다”고 강조하면서도 실패할 경우 정반대의 결과로써 ‘완전한 초토화’를 거듭 언급했다. 

▶리비아 모델을 둘러싼 북미갈등은 빙산의 일각…文정부 중재외교, 선택의 기로에= 
결국 리비아 모델을 둘러싼 북미 간 신경전은 비핵화 방식과 비핵화ㆍ체제보장 맞교환 순서를 둘러싼 갈등의 일환으로 해석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에 대한 체제보장 의지를 확인한 날, 볼턴 보좌관은 언론인터뷰에서 재차 “CVID에서 후퇴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북한이 원하는 답은 아닌 셈이다. 

[사진=연합뉴스]

비핵화 해법을 둘러싼 북한과 미국의 입장 차를 좁히는 건 ‘중매외교’를 필두로 대화모멘텀을 이끌어온 문재인 대통령에 달려있다. 문 대통령은 오는 22일 트럼프 대통령과의 단독 정상회담에서 북한 비핵화 및 체제보장 문제를 집중적으로 논의할 것으로 알려졌다. 두 정상이 간섭없이 허심탄회하게 대화할 수 있는 자리인 만큼 ‘한반도 비핵화’ 로드맵이 조율될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남북 대화모멘텀과 함께 부각되기 시작한 미국과 북한 사이에 낀 우리나라의 지정학적ㆍ정치적 딜레마를 직시할 필요가 있다. 북미 간 양보가 없는 이상, 현재로썬 뾰쪽한 수가 없다는 것이 현실이다. 결국 정부는 어느 한 쪽에 양보를 유도해야 한다. 양보없이는 합의도 없기 때문이다. 일단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17일 국가안보회의(NSC) 상임위 결과를 발표하며 “역지사지가 필요하다”면서 미국의 양보를 우회적으로 촉구했다.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정착의 과정은 그만큼 험난하고 힘들다. 무수히 많은 딜레마 속에서 우리는 선택할 준비를 해야 한다. 주한미군의 전략자산 철수는 북한 비핵화 과정에서의 ‘단계적 보상조치’에 포함될 수 있는가. 주한미군 철수는 없더라도 축소는 비핵화에 대한 보상조치로써 이뤄질 수 있나. 북한에 대한 체제보장, 즉 정상국가 인정 및 북미관계 정상화를 우선한 후 비핵화를 추진할 경우, 철저한 검증절차보다는 신뢰를 바탕으로 한 비핵화 절차가 추진될 가능성이 크다. 이같은 옵션도 우리나라에는 ‘괜찮은 옵션’이 될 수 있는가.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미국을 설득할 것인가. 

munja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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