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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본무 회장 별세]正道경영으로 ‘글로벌 LG’ 초석…일대기로 본 구본무 회장
- 경남 진주 출생…LG家 장남 3세
- 美서 공부 후 1975년 LG화학 입사
- 20년만에 회장직 올라 ‘글로벌 LG’ 반열에
 

1995년 2월 22일 LG 회장 이취임식에서 구본무 신임 회장이 LG 깃발을 흔들고 있다. [사진제공=LG]


[헤럴드경제=천예선 기자]“국민과 사회로부터 존경 받는 기업이 됩시다. 사업구조를 고도화하고 경영 시스템을 혁신하더라도, 사회로부터 인정과 신뢰를 얻지 못하면 영속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는 활동 하나하나가 더 나은 고객의 삶을 만든다는 사명감으로 모든 일에 임합시다.”

구본무 LG그룹 회장이 마지막으로 남긴 2017년 신년 인사말이다. 창립 70주년이던 작년 초 구본무 회장은 임직원들에게 이같은 말을 남긴 후 와병에 들어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1995년 10월 구본무 회장(왼쪽 두 번째)과 허창수 당시 LG전선 회장(세 번째)이 LG전자 평택공장을 찾아 라인을 점검하고 있다. [사진제공=LG]

구 회장은 뚝심과 끈기로 ‘글로벌 LG’의 초석을 다진 인물로 평가된다.

1995년 LG그룹 회장에 오른 후 지난 23년 동안 LG의 매출은 30조원(1994년)에서 2017년 160조원으로 5배 이상, 해외 매출은 약 10조원에서 110조원으로 10배 이상 성장했다. 특유의 끈기와 결단의 리더십으로 디스플레이와 2차전지 사업을 세계 1위로 키워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구 회장은 1945년 2월 10일 경남 진주에서 LG그룹 구자경 명예회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구자경 명예회장은 LG그룹 창업주인 구인회 회장의 장남이다. 

1996년 10월 구본무 회장(왼쪽)이 잭 웰치 前 GE 회장과의 미팅에서 경영혁신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있는 모습. [사진제공=LG]


중학생 시절 평생의 관심사가 된 새와 첫 인연을 맺었다. 산에 올랐다가 다친 새 한마리를 우연히 발견하고 집에 가져와 치료해 돌려보낸 일화가 있다.

1964년 연세대학교 상경대에 입학했지만 졸업을 하지 않고 미국 애슐랜드대학교로 학적을 옮겼다. 1972년 애슐랜드대에서 경영학 학사를 받고 1974년 클리블랜드 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를 받았다.

이듬해인 1975년 LG화학 심사과 부장으로 입사해 경영수업을 본격화했다. 

2004년 3월 LG디스플레이(前 LG필립스 LCD) 파주공장 기공식에 참석한 구본무 회장(오른쪽 세번째) [사진제공=LG]

1981년 LG전자 이사, 1984년 LG전자 일본 동경주재 상무 등을 거쳐 1989년 그룹 부회장에 올랐다.

1995년 구자경 명예회장이 은퇴하며 LG그룹 3대 회장에 취임했다.

2010년 7월 LG화학 미국 홀랜드 전기차배터리 공장 기공식에서 구본무 회장과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악수하고 있는 모습. [사진제공=LG]

구 회장이 총수로 있던 지난 23년간 LG는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 등 격랑의 시기를 거쳤다.

힘든 시기일수록 구 회장의 위기관리능력은 빛났다. 외환위기 때는 핵심역량이 될 업종을 선택ㆍ집중하고, 2003년 대기업 최초 지주회사 전환으로 선진적인 지배구조 시스템을 구축했다. 

2002년 10월 구본무 회장이 전기차배터리 개발을 위해 만든 시제품을 테스트하고 있는 모습.[사진제공=LG]

특히 1998년 말 정부가 주도한 빅딜 논의로 반도체 사업 유지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당시 LG전자와 LG반도체가 각각 영위하던 LCD 사업을 따로 분리해 ‘LG LCD’를 설립한 것은 구 회장의 과감한 결단력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로 평가된다.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2009년에는 LG전자가 분기 영업이익 1조원을 돌파하는 등 그룹 전체적으로 오히려 사상 최대 실적을 냈다.
 
2014년 3월 연구개발성과보고회에서 구본무 회장이 연구과제인 LG전자 올레드 TV를 살펴보는 모습. [사진제공=LG]

2005년 ‘LG웨이(Way)’를 선언하며 전자ㆍ화학ㆍ통신 중심의 글로벌 리딩 기업으로 재도약하는 기반을 마련한 것이 디딤돌이 됐다.

구 회장은 “어려울수록 투명한 것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정도(正道) 경영철학을 실천에 옮긴 드문 경영자로 평가된다. 윤리경영을 바탕으로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일등 LG’를 만들겠다는 의지다.

2015년 12월 마곡 LG사이언스파크 건설 현장에서 구본무 회장(가운데)과 하현회 ㈜LG 부회장(오른쪽)이 현장을 점검하고 있다. [사진제공=LG]

미래 준비도 적극적이었다.

“미래성장사업의 성패는 R&D(연구개발)에서 판가름난다”는 신념 아래 디스플레이, 2차전지, LTE에 대대적 투자를 단행했다. 나아가 강서구 마곡산업단지에 4조원을 투자해 국내 최대규모의 융복합 연구단지인 ‘LG사이언스파크’ 건립을 결정했다.


2006년 6월 LG글로벌챌린저 발대식에서 구본무 회장이 대학생들과 깃발을 흔들고 있다. 구 회장은 재계 총수로서는 드물게  대학생 행사인 'LG글로벌챌린저' 발대식에 해마다 참석해 "원대한 꿈 품고 치열하게 도전하라"며 학생들을 응원했다. [사진제공=LG]

구 회장은 소탈하고 탈(脫)권위적인 성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약속은 예정시간보다 30분 먼저 나와 기다리는 것이 보통이고, 회의때도 미리 들어와 자리를 잡고 자신의 얘기는 5분 이내로 간결하게 하는 오너로 기억된다.

2002년 5월 구본무 회장(가운데)이 직원들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 [사진제공=LG]

회장 전용 헬기를 임직원 출장용으로 쓸 수 있게 개방하고, LG트윈타워 1층 주차장에 고객들이 차를 세울 수 있도록 임직원들에게 지하주차장을 이용하도록 당부한 것도 유명한 일화다.

탈권위는 LG의 심벌마크인 ‘미래의 얼굴’과도 무관치 않다. 구 회장은 럭키금성에서 LG로 CI를 변경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2011년 1월 구본무 회장이 글로벌CEO전략회의에서 최고경영진과 대화하고 있다. [사진제공=LG]

주변에서는 “럭키금성이 널리 알려져 있어 바꿀 필요가 없다”며 반대했지만 구 회장은 글로벌 기업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CI 변경이 반드시 필요하다며 뚝심있게 밀어붙였다. 심벌마크를 선정하는 과정에서도 여러 안들 가운데 LG의 현재 심벌마크인 ‘미래의 얼굴’이 세계, 미래, 젊음, 인간, 기술의 의미를 포용하고 있다고 판단해 최종 결정했다. 
cheo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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