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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스파이어] 우리들의 위투② “커서 상담사 됐죠. 그때의 날 닮은 아이들 안아주고 싶어서”

[이정아 기자의 인스파이어]



“당신이 뭘 안다고 나를 상담해요?”

그러나 상담 전문가 지은(가명) 씨가 자신의 상처를 내보이자 아이의 싸늘했던 눈빛이 변하기 시작했다. 아픈 사람의 마음은 아파 본 사람만이 안다고. 그는 어린 시절 그때의 나를 닮은 아이들을 안아주고 싶었다고 했다. 지은 씨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훈련된 공감이 아니라 아이들의 아픔을 같이 느끼는 거죠.”

친족 성폭력 피해 아동청소년 20여 명이 현재 지은 씨와의 치료 상담을 통해 다시 사회로 나서고 있다. 아이들은 그를 ‘해피바이러스’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두 아이의 엄마인 지은(가명) 씨는 "수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이 자신을 보고 포기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인터뷰에 응했다"고 전했다.

#. “살고 싶었어요.”

온몸에 멍이 들도록 아버지에게 맞은 뒤에도, 어린 지은은 살기 위해 학교에 갔다. 잦은 불안과 불면이 삶을 잠식해도 어린 지은이 할 수 있는 건 한없이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을 바라보는 일 뿐이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지은은 그럴듯한 망각을 몸소 실천하는 듯했지만, 망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마음의 가역(可逆)은 불완전하다. 언제나 흔적이 남는다.

“저는 거절을 잘하지 못했어요. 다른 사람한테 내 의사를 표현해야 되는데, 그럴 때마다 아버지한테 학대를 받았잖아요. 거절에 대한 불안이 남아 있는 채로 성인이 되니까 사회에 나와서 성폭행까지 이어지더라는 거죠.”

그런 지은 씨에게 돌아온 대답은 숨죽여서 지내라. 그는 성폭행 피해 사실을 주변 사람들에게 터놓을 때마다 “문제를 더 제기하면 너만 다친다”는 말을 수차례 들었다. 그는 긴 세월을 사라지지 않는 상처와 맞서 싸워야 했다.

“난 어떻게 해야 하지? 매일 나와의 소통을 스스로 했어요. 너 힘들었지, 잘했어, 부족했지만 잘했어. 10년 넘게 제게 이렇게 말했어요. 상처를 햇볕에 내어놓고 말려야 했어요.”

그가 가정폭력, 성폭력 상담 전문가 과정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지은 씨는 가슴을 짓누르는 상처에 자신의 삶을 내어주고 싶지 않았다. 상담학 공부를 하는 시간은 자신의 상처를 풀어내며 다독여온 여정인 동시에 치열한 고발의 시간이었다. 


“공부를 하다 보니까 제 자신이 얼마나 소중하고 특별한 존재인지 알게 되었어요. 아, 나도 살아갈 가치가 있는 사람이구나…. 나도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또 도움을 받으며 살아가고 싶다는 게 저의 바람이었어요.” 그는 인터뷰 중 잠시 숨을 고르더니 “살고 싶었다”고 했다.

지은 씨는 지난 2011년부터 친족 성폭행 피해 아동청소년들을 치료 상담하기 시작했다.


#. 상처 입은 치유자

지난달 22일 지은 씨를 만나러 가는 길. 차는 산길로 접어들었다. 꼬불꼬불 굽이진 길이어서 운전기사는 쉼 없이 계속 핸들을 꺾었다. 이곳에는 친족 성폭행 피해 아동청소년 수십여 명이 모여 정신과 심리치료를 받고 있다. 가해자인 가족이 피해 아이에게 찾아와 협박하는 상황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지도에는 표기돼 있지 않은 곳이다.

“제가 만나는 아이들은 가족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아이들이잖아요. ‘당신은 끔찍한 일을 당해보지도 않았으면서 어떻게 나를 상담하세요?’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많아요. 상담 내내 아이들이 자기 문제를 더 드러내지 않고 피상적인 이야기만 하려고 하거든요. 그래서 저는 제 상처를 노출해요. 그때 아이들이 마음이 열더라고요.”

심리학자 칼 구스타브 융(Carl Gustav Jung)은 ‘모든 치유자는 상처 입은 사람’이라고 했다. 상처가 있는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게 진정한 치유자가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자신이 아파 본 만큼 다른 사람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은 씨는 “이론적인 공감이 아니라 피해 아이들과 같이 상처를 느낀다”고 덧붙여 말했다. 

“‘다 치유됩니다’라고 이야기하는 상담사도 있어요. 그런데 저는 치유가 안 된다고 봐요. 저도 어느 정도 치유가 되었다고 하지만 롤러코스터처럼 감정의 기복이 계속되거든요. 살아가면서 만나는 좋은 사람, 아름다운 추억을 통해서 그 흔적이 작게 머물러 있을 뿐이에요. 작은 것이 언제 다시 커질 지 몰라요. 저는 감정을 누를 수 있는 내적 힘이 있기 때문에 살아가는 거예요.”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지은 씨는 가족을 이곳에 데려오곤 한다. 엄마로서 아내로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친족 성폭행 피해 아이들에게 계속해서 보여주기 위해서다.

“저는 전문 상담사이기도 하지만, 아이들의 롤모델이 되고 싶어요. 사회에 나가서 건강하게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원하는 행복한 삶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아이들도 행복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으니까. 나의 작은 변화가 그들에게 큰 변화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저는 그런 삶을 살고 싶어요.”

이어 지은 씨가 말했다. 숨죽이던 사회적 약자들이 침묵을 깨고 “아니다”라고 말해야 한다고. 그 과정이 지난하고 고단하겠지만 함께 힘을 모아야 한다고.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포기하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어요. 가해자 그 사람들?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에요. 우리 모두가 같이 하면, 그리고 서로 도우면, 살아갈 수 있어요. 자신을 위해 조금씩 그리고 하나씩 변화해 보세요. 그러면 원하는 행복을 가질 수 있어요. 아무 보잘 것 없는 사람한테, 상처를 받았다는 이유로 자기를 버리지 마세요. 그러기엔 당신의 인생이 너무 아까워요.”

오늘도 지은 씨는 굽이진 길을 따라 상처 입은 아이들을 만나러 간다.





[당신들의 미투, 우리들의 위투] 기획 시리즈

뇌는 상처를 기억한다
“커서 상담사 됐죠. 그때의 날 닮은 아이들 안아주고 싶어서”
‘우리’가 ‘그들’의 미투를 다시 읽다


dsu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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