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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영길의 현장에서] 원세훈 판결에 던져야 할 진짜 질문

영화 ‘올드보이’ 주인공 오대수는 15년 간 영문을 모른채 어딘가에 감금된다. 풀려난 그는 자신을 가두라고 사주한 고등학교 동창 이우진을 찾아내고 이유를 추궁한다. 하지만 이우진은 “질문이 틀렸다”면서 ‘왜 가뒀을까’가 아니라 ‘왜 풀어줬을까’라고 물어야 한다고 비웃는다. 영화가 끝날 무렵, 이우진이 원한을 품었던 오대수를 감금한 것은 그 자체로 복수가 아니라 ‘15년 동안’ 누군가와 격리하는 수단이었을 뿐이라는 결말이 드러난다.

19일 대법원 확정판결이 내려진 원세훈 사건도 질문을 제대로 던져야 하는 사건이다. 국정원이 조직적으로 18대 대선에 개입한 사건인데, 기소된 지 4년 10개월 만에 실형이 확정됐다. 국정원이 도왔던 박근혜 전 대통령은 파면되지 않았더라도 이미 5년의 임기를 채우고 지난 2월 퇴임했을 것이다. 선거법상 공소시효는 6개월이다. ‘6개월만 넘으면 봐주자’가 아니라 ‘선거사범은 빨리 처리해야 한다’는 취지다.

대법원은 2015년에는 이번과 달리 실형을 선고했던 항소심 판결을 “다시 심리하라”고 판결했다. 소수의견도 없이 13대0, 만장일치 의견이었다. 이후 파기환송심 재판을 맡은 김시철 부장판사는 심리를 1년 7개월이나 끌었고, 재판장이 바뀐 뒤에서야 겨우 판결이 선고됐다. 이 사건 1심 재판부는 원 전 원장에게 선거법 위반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 정통성에 흠이 가지 않는 결론이었다. 반면 항소심은 국정원법과 선거법 위반 혐의를 모두 유죄 판결했다. 당연히 대법원이 토론해야 하는 쟁점은 1,2심이 엇갈린 선거법 위반 여부였는데, 3년 전에는 문제삼지 않았다.

원세훈 사건을 놓고 대법원에 던져야 할 질문은 ‘왜 그 때와 지금 결론이 다르냐’가 아니다. 표면적으로 2015년과 이번 판결이 충돌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시 대법원은 선거법 위반 여부가 아닌 검찰이 제출한 일부 파일에 ‘증거능력이 있느냐’를 쟁점으로 삼았다.‘13대0’으로 결론난 대법원 첫 판결에 이름을 올렸던 대법관 중 7명이 이번 심리에도 관여했다. 고영한ㆍ권순일ㆍ박상옥ㆍ김신ㆍ김소영 대법관은 선거법 위반을 인정했다. 김창석ㆍ조희대 대법관만 혐의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봤다. 2015년 대법관들이 쟁점을 ‘선거법 위반 여부’로 잡고 표결했다면 원 전 원장에게 실형을 확정한 판결은 그 때 확정됐을 가능성이 크다.

여기서 대법원에게 던져야 할 진짜 질문이 나온다. “왜 지금은 결론이 다르냐”가 아니라 “왜 3년 전에 내릴 수 있던 결론을 이제서야 내놓느냐”고 물어야 한다. 아무리 양승태 대법원장이라도 대법관들을 상대로 ‘선거법 위반’이라는 의견을 바꾸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하지만 문제가 있어 보이는 증거 일부를 쟁점으로 삼고 ‘다시 심리 해보자’는 제안은 가능했을 것이다. 5년 가까이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대법원은 박근혜 정부의 미움을 사는 위험을 피했다. 원하는 결론이 아니라면 선고를 최대한 늦춘다. 소설가 정을병은 자신의 작품에서 ‘판사는 미뤄 조진다’고 표현했다.

지난 1월 법원이 자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박근혜 정부 때 법원행정처는 원세훈 사건 2심 판결을 앞두고 판사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청와대에 전달했다고 한다. 당시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은 원 전 원장이 구속되자 대법원에 ‘전원합의체에 회부해달라’는 의견을 전달했다. 조사 결과가 나오자 대법관들은 오히려 “일부 언론의 사실과 다른 보도로 사법부 독립과 재판의 공정성에 불필요한 의심과 오해를 불러일으켜 유감”이라고 했다.

jyg97@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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