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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평대군이 역모를 꿈꿨다고?…시화 즐긴 문인이자 예술가였다
‘야심가인가, 희생자인가’

세종의 셋째 아들 안평대군을 둘러싼 세상의 시각은 엇갈린다.

수양대군에게 ‘역모’로 몰려 처형당한 안평과 예술가로서 세상과 거리를 두고 이상을 꿈꾸었던 안평 사이의 거리는 멀다.

20년전, 안평대군의 삶을 추적해 그의 예술혼과 정신세계를 한 권의 책으로 내놓겠다고 작정했던 심경호 고려대 교수 역시 이 의문에서 시작했다.


‘단종실록’에는 안평대군이 역모의 뜻을 품은 것처럼 보이는 시들이 실려 있다. 예컨대 ‘어느 때나 햇빛이 커져서/ 밝고 밝게 사방에 비칠꼬’라는 안평대군의 시는 자신을 태양에 비유한 것으로 읽힐 소지가 있다.

그런가하면 안평은 세종으로부터 보옥을 하사받고 스스로 ‘낭간거사’란 호를 지었다. 거사(居士)란 ‘정치의 장을 떠난 평범한 사람’이라는 뜻이 있다. 정치적으로 큰 야심이 없었다는 얘기다.

심 교수는 “계유정난의 경과를 서술하는 단종실록의 기록은 날조물의 집적”이라며 “단종실록 편수자들은 국정과 관련 없는 안평대군의 언행을 날짜에 맞춰 안배하고, 악의적인 인물 평가를 부기했다”고 주장한다.

심 교수는 안평대군의 시문을 모으고 시문을 헌정한 이들의 글을 되읽으면서, 정치와 예술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문학과 예술 모임 자체가 권력행위로 간주됐던 시대, 국왕의 아들이면서 지성의 모임을 주도했던 안평대군의 행위는 그 목적과 상관없이 정치적이었고 권력의 현시로 봐야한다는 것이다. 이런 모임이 근대에서도 정치행위로 여겨진 터에, 당시로선 더 더욱 그럴 수 밖에 없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안평은 세종이 추진하는 각종 국가사업에서 큰 역할을 했다. 훈민정음 창제, ‘동국정운’ ‘용비어천가’ 등 정음 문헌의 편찬에서 그의 역할은 크다. 20대에엔 시학에서 일정한 경지에 이르렀다. 문인과 지식인들이 안평 주위에 모이는건 당연하다. 1447년 안견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는 그 결정체라 할 만하다. 안평은 도원에서 노니는 꿈을 꾼 뒤 안견에게 몽유의 인상을 그림으로 그리게 하고 스스로 ‘도원기’를 지었으며, 그 이후 ‘도원도’와 ‘도원기’에 문신들이 시문과 부로 장식하게 했다. 안평의 이상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심 교수는 안평대군의 비극을 그의 탁월함에서 찾는다. 바꿔말하면 수양대군의 열등감이다.

특히 한시를 자유자재로 짓는 안평에 수양대군은 열등감을 느꼈으며 동생을 죽이는 주요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한시의 격차는 문학의 중흥기에 매우 뼈아픈 결함이었다.

심 교수가 20년 만에 스스로의 약속을 지켜 펴낸 1200쪽에 달하는 평전 ‘안평’(알마)은 한 인간을 이해하려는 저자의 애정어린 탐색과 세심한 눈길, 시대의 좌표 위에서 읽어내려는 균형감을 보여준다. 저자는 “안평대군의 35년간 삶을 꿈속에 노닒, 즉 ‘몽유’(夢遊)라고 규정해도 좋으리라. 그 꿈은 질척질척하여 깨어난 뒤 뒷맛이 씁쓸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청백하여 차라리 쓸쓸하기까지 한 그런 꿈이었다.”고 정리했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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