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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사회의 미투②] 성폭력 트라우마 ‘전쟁 악몽’ 맞먹어…“피해자 치유 도와야”
-“왜 이제 거론하나” 피해자책임론은 문제
-“2차피해, 상처 치유에 달려…응원 절실”


[헤럴드경제=정세희 기자] “나는 사람이 아닌 짐승을 죽였다.”

지난 1991년 성폭행 가해자를 찾아가 흉기로 살해한 김부남 씨가 법정에서 한 말이다. 김 씨는 아홉 살 때 이웃 남성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했지만 그 누구에게도 보호받지 못했다. 당시 경찰은 “성범죄는 피해자가 고소를 해야 처벌할 수 있는 친고죄인데다 공소시효 6개월도 지나 소용이 없다”고 말했다. 주변 사람들은 “어렸을 때 일을 왜 잊지 못하고 있느냐”며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 정신분열증에 시달리던 그는 직접 가해자를 흉기로 죽이고 말았다. 김부남 사건은 성폭행 피해자가 입은 후유증이 얼마나 끔찍한지 알려주는 계기가 됐다. 
검찰 내 성폭력 사건 진상규명 촉구 전국 16개 지역 동시 기자회견이 열렸다. 1일 대검찰청앞에서 100여개 여성시민단체를 중심으로 200여명의 인원이 참석했다. 이들은 법무,검찰 조직내 성폭력사건을 수사할 민간특별조사위원회를 꾸릴 것과 법무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 직장내 성폭력 전수조사, 성평등교육, 이를 폭로한 피해자에 대한 2차 불이익을 멈출것을 주장했다. 정희조 기자/checho@heraldcorp.com

그러나 30여 년이 지난 현재 “옛날 사건을 왜 지금 꺼내느냐”는 목소리는 변함이 없다. 피해자에게 잘못을 묻는 대표적인 피해자 책임론이다. 전문가들은 피해자에게 트라우마를 잊을 것을 강요하는 태도는 피해자를 두 번 죽이는 일이라고 경고한다.

16일 성폭력 피해자들의 ‘외상 후 스트레스’(트라우마)를 분석한 국내외 논문을 종합해보면, 성폭력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은 다른 어떤 외상보다 크고, 치료도 오래 걸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임명호 단국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와 충남해바라기센터 연구팀이 대학병원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은 성폭력 피해자 40명과 일반인 83명의 정신과적 임상특성을 비교한 결과 성폭력 피해자들의 외상 후 스트레스 점수가 60점 이상인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전쟁을 경험한 환자와 맞먹는 수치였다. 임 교수는 이에 대해 “교통사고 등 일반적인 외상과는 달리 자아 방어 능력 전체가 흔들릴 만큼 강력한 트라우마”라고 설명했다.

트라우마가 장기간에 걸쳐서 악화되는 경우도 있었다. 21년 이상 병원 치료를 받는 환자가 대표적이다. 불안을 이겨내는 자아 방어 시스템이 무너지고 자아에 대한 왜곡 등이 생겨 정신병적 증상이 생긴 것이라는 게 연구팀의 설명이다.

전문가들은 트라우마와 싸우고 있는 성폭력 피해자들이 늦게라도 문제를 제기를 하는 것이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의 하나라고 입을 모은다. 피해자의 치유를 위해서는 주변인들의 지지와 응원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김보화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소 ‘울림’ 책임연구원은 “피해자가 처음에 문제를 제기하려 했어도 주변에서 참으라고 해서 참는 경우가 많다”며 “지금이라도 치유를 하려고 나선 사람들에게 그동안 조용히 있다가 왜 이제 와서 시끄럽게 하냐고 추궁하는 것은 우리 사회에 오랫동안 구축돼 온 남성중심적 피해자 책임론”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1차 피해보다 2차 피해가 치유에 더 영향을 미친다”며 “피해자를 단순히 불쌍한 개인으로 바라볼 게 아니라, 피해자가 보호받고 보상받는 것은 당연한 권리라는 인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say@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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