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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볍고 발랄한 ‘시장 페미니즘’의 속셈
10대 소녀 겨냥 ‘나에게 운동시켜 준다면’
여성 운동할 권리도 ‘허락의 대상’ 속뜻
대중매체에 강한 여성 등장 유행에 그쳐
이윤추구 상업화 되레 女權 퇴보시켜


#나이키의 수많은 레전드 광고 중 ‘나에게 운동을 시켜준다면’(If You Let Me Play. 1995년)이란 광고는 가장 성공한 작품으로 꼽힌다. 다양한 인종의 10대 초반의 어린 소녀들이 등장해 카메라에 대고 “나에게 운동을 시켜준다면, 나 자신을 더 좋아하게 될 거야” “내가 유방암에 걸릴 확률이 60퍼센트 낮아질 거야”“나를 때리는 남자와 더 쉽게 헤어질거야”“나는 지금보다 강해질 거야”라는 말을 한마디씩 던지는 30초짜리 영상이다. 보는 이들로 하여금 눈감은 진실을 목격하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하는 이 광고로 나이키는 페미니즘, 교육, 진보적인 브랜드 이미지를 형성, 안정적인 매출을 유지할 수 있게 됐다.

#2014년 8월, MTV 비디오뮤직 어워즈에서 가수 비욘세는 페미니스트로 화려하게 이미지 변신했다. 마지막 순서로 나온 비욘세는 ‘플로리스’라는 노래를 불렀고 무대에는 ‘페미니스트’라는 글자가 네온 조명으로 새겨졌다, ‘플로리스’는 나이지리아 작가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강연, 즉 “우리는 소녀들에게 스스로 몸을 웅크려 더 작아지라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소녀에게 ‘너희도 꿈을 가질 수 있어. 그런데 너무 큰 꿈은 말고’”라는 내용을 가사로 삼고 있는데, 그 반향은 엄청났다.

“문제는 페미니즘이 재미있지 않다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복잡하고 딱딱하며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한다. 페미니즘은 심각하다. 왜냐하면 페미니즘은 인간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달라고 요구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이기 때문이다”(‘페미니즘을 팝니다’에서)

페미니즘은 더이상 과거 거리에서 외치던 투쟁적인 구호가 아니다. 요즘의 페미니즘은 가볍고 발랄하다. 엠마 왓슨 등 연예인이나 오피니언 리더들의 화려하고 세련된 제스처와 함께 대중들도 친근해졌다. 어찌보면 페미니스트들이 애타게 바라던 금기된 언어에서 해방된 것 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애초 페미니즘이 추구하는 남녀가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평등한 사회가 구현된 걸까?

대표적인 페미니즘 잡지 ‘비치(Bitch)’의 창간자인 앤디 자이슬러는 ‘페미니즘을 팝니다’(세종서적)에서 최근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페미니즘 대중화현상을 냉정하게 파헤친다.


20년 넘게 페미니스트의 관점에서 영화나 TV 프로그램, 광고를 분석해온 그는 최근의 페미니즘 대중화의 이면을 예리하게 파고든다. 상품과 광고, 방송과 연예인 가십에 등장하는 멋진 페미니즘은 일반적으로 ‘팝 페미니즘’이나 ‘달콤한 페미니즘’으로 불린다. 매력적이지만 위협적이지 않고 섹시하지만 과도하게 야하지 않는 페미니스트란 전에 없던 이미지가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저자는 이런 페미니즘을 상업화된 페미니즘이란 의미에서 ‘시장 페미니즘’이라 부른다. 정치 운동으로서의 페미니즘과 구분되는 지점이다.

시장 페미니즘의 특징은 개인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이다. 개인의 선택만으로 무언가를 바꿀 수 있다고 본다. 즉 여성 해방을 의미하는 여성용 담배를 피우거나 독신여성의 정체성으로서 비혼 반지를 선택하는 식이다. 성적 주도권을 의미하는 차원에서 섹시한 속옷을 입을 수 있다. 무엇을 하든 페미니즘적 선택이라고 간주하면 여성 해방을 위한 실천이 된다. 이런 배경에서는 제모나 하이힐을 신는 것까지 페미니즘을 위한 정치적 행동이 된다. 그러나 저자는 이는 페미니즘 보다 자본주의에 가깝다고 지적한다. 기업은 이윤추구가 목적이기 때문에 페미니즘을 상품에 이용하지만 상품과 실제 페미니즘을 결합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상품에 가치가 높은 페미니즘의 색깔을 입혀 소비자가 상품을 구입함으로써 뭔가를 바꿀 수 있다고 착각하게 만들 뿐이다.

영화와 TV프로그램, 소설 등 대중매체에 강한 여성을 등장시킴으로써 여권이 신장된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도 시장 페미니즘, 방송 페미니즘이 하는 일이다. 이런 연예인 페미니즘은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강력한 유인력이 있지만 유행에 그치고 만다, 좋은 의도에서 출발했더라도 성평등을 위한 구체적인 행동보다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을 선언하는 정도다. 여권 신장을 강조하는 연예인의 발언이 여성을 착취하는 영화업계, 방송업계, 연예산업계의 관행을 은폐하기도 한다.

저자는 페미니즘은 인기 상품이 아니고 성평등이라는 목적을 달성할 때까지 관철해야 할 사회운동이며 의제를 다루고 변화를 촉구하는 정치운동임을 강조한다. 이런 페미니즘은 개인을 우선시하는 시장 페미니즘, 연예인 페미니즘과 근본적으로 충돌할 수 밖에 없다.

시장 페미니즘 시각에서 보면, 가령 나이키의 광고 ‘나에게 운동을 시켜준다면’은 페미니즘을 내세운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퇴보시켜 놓았다. 이 광고는 페미니스트들이 싸워 얻은, 1972년 이미 법으로 제정된 남학생과 여학생의 체육활동 평등권이란 정당한 요구를 ‘요청’으로, 또 남성들에게 호소하는 식으로 희석시켜 버렸다는 비판을 받게 된다. 여성의 운동할 권리는 여전히 허락의 대상이며, 당연한 권리가 아니라 남성이 여성에게 주는 선물이란 메시지를 전한 꼴이 된다.

최근 우리사회 문화예술계 성폭력 사태는 페미니즘에 대한 높은 관심의 연장선상에서 새롭게 해석될 여지가 많다. 소수의 여성이 권리를 누리는 동안 대부분의 여성은 여전히 성범죄에 노출되거나 여성성을 강요받거나 임금격차, 승진 등의 불평등에 처해 있다. 이는 시장 페미니즘, 팝 페미니즘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 책은 명쾌하게 보여준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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