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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조 8일간의 화성행차는 의도된 군사행동이었다
지난해 10월27일 ‘무예도보통지’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남북한 공동추진 말이 나오다가 북한의 미사일발사로 관계가 끊기면서 북한이 단독신청한 것이다.

‘무예도보통지’는 정조가 직접 편찬의 방향을 잡은 후 규장각 검서관 이덕무, 박제가와 장용영 장교 백동수 등으로 하여금 작업케해 1790년 간행됐다. 전투 동작 하나하나를 글과 그림으로 해설한 알기쉬운 실전훈련서다. 정조는 이 군사훈련서 뿐만아니라 최강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만들어 기개를 펼쳤다. 정조와 화성 전문가인 김준혁 한신대 교수는 조선의 문예부흥을 이끈 이런 정조를 ‘무인군주’로 부른다. 


그렇다면 정조는 왜 이런 군사적 행동을 했을까. 저자는 저서 ‘장용영’에서 널리 알려진 정조의 8일간의 화성행차를 이와 연관시킨다. 종래 알려진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한 행사였다기 보다 사도세자의 북벌의 꿈을 이루기 위해 그동안 작심하고 준비해온 군사적 능력을 마음껏 과시하는게 숨겨진 주목적이었다는 것이다. 행차에서 친위부대인 장용영 군사들의 일사분란함을 보여줌과 동시에 신무기를 선보임으로써 화성유수부가 강력한 군사도시임을 입증했다는 설명이다. 또한 화성 내에 거주하는 백성들과 함께 훈련을 받음으로써 민보(民堡), 즉 백성이 국방의 보루라는 새로운 개념을 보여줬다.

이는 정조가 추구했던 국방개혁의 반대를 일소하는 효과도 있었다. 정조는 문무가 같이 발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특히 병자호란처럼 힘이 없어 외세에 치욕을 당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사도세자의 꿈을 잇는데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정조의 꿈역시 갑작스런 죽음으로 물거품이 됐다. 정순대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가장 강력하게 밀어붙인 게 장용영의 혁파였다. 표면적 이유는 엄청난 재원이었지만 정조와 관련된 정치세력의 제거였다. 이로써 장용영 창설을 통해 조선후기 군제개혁과 민생안정을 추구했던 개혁정책은 꺽이고 만다.

이 책은 저자의 ‘화성, 정조와 다산의 꿈이 어우러진 대동의 도시’에 이은 정조 3부작 중 두번째로 장용영을 통한 정조의 꿈을 만날 수 있다. 

이윤미 기자/mee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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