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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장에서]“내 월급은 다 모으고 생활비는 부모님이”…5만원권 비밀
서울의 한 중소기업에서 비서로 근무하는 지인이 있다. 얼마 전 모임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조만간 시작되는 연말정산이 화제로 올랐다. 30대가 대부분인 모임 참석자들은 결혼, 출산, 육아 등으로 지출이 많아 ‘13월의 월급’을 기대하는 분위기였지만 그는 달랐다.

이른바 ‘엄카’(엄마 카드) 소지자인 그는 평소 생활비를 부모님의 신용카드로 쓰는 바람에 연말정산에서 적잖은 세액을 토해내야 할 게 뻔하다는 것이었다. 최근 임신을 하면서 준비한 각종 용품과 아기방 인테리어 비용도 친정에서 따로 챙겨준 돈으로 해결했다고 한다. 결혼을 했지만 평범한 맞벌이 부부가 돈을 모으려면 경제적 독립은 할 수 없다는 게 그의 소신이다.

그런데 그나마 ‘카드’를 쓰는 경우는 투명한 편이다. 아예 5만원 권을 받아 쓰는 경우도 적지 않다. 1000만원도 손가방 하나에 들어간다. 5만원권은 드러나지 않는 소득으로 만든 현금을 드러나지 않게 증여하는데 안성맞춤인 화폐다.

한국은행은 매월 권화종별로 화폐발행잔액을 집계한다. 9일 공개된 자료를 보면 지난해 11월 말 기준으로 전체 화폐발행잔액 106조8560억원 가운데 5만원권 지폐가 85조5996억원으로 나타났다. 화폐발행잔액 중 80.1%가 5만원권인 셈이다. 화폐발행잔액은 한은이 시중에 공급한 화폐에서 환수한 돈을 제외하고 시중에 남은 금액을 뜻한다.

5만원권이 80%를 돌파하기는 2009년 6월 첫 발행 이후 처음이다. 당시 시중 화폐 중 5만원권 비중은 7.7%에 불과했지만 9년도 안 돼 70%포인트 넘게 수직상승한 것이다. 당시 79.6%였던 1만원권의 비중은 작년 11월 말 14.7%로 역대 최저로 주저앉았다. 5만원권의 인기에 1만원권의 입지가 좁아지며 상황이 완전 역전됐다.

그때보다 경제규모가 커지고 물가가 상승함에 따라 고액권의 수요가 늘면서 5만원권이 1만원권을 대체했다는 게 한은의 설명이다. 경제가 발전해서 고액권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럼에도 이번 자료를 보니 모임에서 만난 지인의 생각이 떨쳐지지 않았다.

거액의 자산가는 물론 중산층 이상에서도 증여세를 피해 자녀에게 고액권 현금으로 돈을 물려주는 경우를 일상에서 많이 볼 수 있어서다. 5만원권 발행을 시작했을 때도 불법 상속ㆍ증여에 대한 지적들이 나왔는데, 아직까지도 이런 우려를 완전히 가라앉히지 못하는 실정이다.


발행된 5만원권이 돌지 못하는 문제도 있다. 작년 5만원권 환수율(발행액 대비 환수액)은 1분기 66.0%, 2분기 55.9%, 3분기 26.1%로 떨어졌다. 1만원권 환수율이 100%에 이르는 것과 비교하면 지나치게 낮다.

이 때문에 5만원권이 불법 정치자금, 세금탈루 등 지하경제로 흘러들어 가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계속돼 왔다.

한은에서는 국정감사에서 이 문제가 나올 때마다 지하경제 유입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실효성 있는 진단과 적절한 대책을 세우기 위해 실태조사 등 노력하겠다는 대답을 거듭 내놨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5만원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뾰족한 방안이 나오지 않고 있다.

해외에서도 고액권의 부작용이 통화당국의 골머리를 앓게 하고 있다. 이에 유럽중앙은행(ECB)은 올 연말께 500유로 지폐 발행을 중단하기로 했다. 고액 지폐가 돈 세탁 등 범죄에 악용되는 문제가 지속적으로 발생했기 때문이다.

최근 1년새 가상화폐 가격이 급등했는데, 검은 돈의 유입된 결과라는 분석이 있다. 값이 오를 수록 검은 돈을 세탁하고 유통시키기에는 유리할 수 있다.

물론 500유로는 우리나라 돈으로 64만원 정도나 되는 데다가, 50유로권(약 6만4000원)이나 100유로권(약 13만원)도 많이 사용되고 있어 우리나라와 단순 비교는 어렵다. 그러나 폐지론이 끊이지 않는 5만원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부와 통화당국이 ECB처럼 특단의 대책을 내놔야 할 때다.

spa@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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