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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합의정치·실리외교…중세 고려史를 알아야 하는 이유
한국의 중세인 고려시대는 사료가 많지 않아 실체를 정확히 알기가 어렵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묘지명과 개인문집 정도가 전부다. 수도 개경(개성)이 북한에 있는 것도 한 이유다. 삼국시대와 조선시대에 낀 고려시대의 정치·사회·문화를 복원하고 이 시대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살피는 일이 간단치 않다.

한국역사연구회가 ‘시대사총서’(전10권)의 일환으로 이번에 펴낸 ‘고려시대사’(전2권·푸른역사)는 여러 학자가 함께 공동 저술하고 최신 연구결과를 최대한 반영했다는 점에서 관심을 가질 만하다.


저자들이 이번 저술에서 먼저 주안점을 둔 것은 고려시대 왕의 통치방식이다. 저자에 따르면, 중앙정치의 구조와 왕의 국정운영방식, 지방제도는 이전 후삼국이나 이후 조선과 다르다.

고려는 신라와 달리 골품제가 폐기돼 중앙정치에 참여하는 지배층의 범주가 크게 넓어졌다. 광종의 독단적인 정치운영과 경종 대 권신의 권력 남용으로 지배층의 다수가 희생되자 고려 지배층은 국왕이 권력 남용만 하지 않는다면 국왕을 중심으로 국왕과 신료가 합의하에 국정을 이끌어가는 정치체제를 수립한다. 이는 성종 대에 결실을 이뤄 관료 제도를 새로 정비하고 3성 6부를 통해 국가를 운영하게 된다. 국왕의 위상과 역할은 국가 행정 중심기구인 6부 운영을 둘러싼 권력 구조에서 나타난다. 당시 6부는 재상을 거치지 않고 국왕에게 국정을 직접 상주했다. 이는 국왕이 6부 행정을 직접 관할했음을 의미한다. 잘못된 통치행위를 비판하는 대간 제도가 있었지만 최종결정권자는 국왕이었다. 국왕이 최종 결정권을 행사하면서도 국왕과 신료가 함께 국정을 논의하는 합의 정치가 이뤄진 것이다.

고려의 실리주의 외교는 새삼스럽다.

한국 중세에서 국제관계의 중심은 중국이 아닌 북방민족과의 관계였다. 1010년, 1080년 송과 여진을 굴복시킨 요의 침략에 맞서 고려는 강감찬의 지휘아래 요군을 괴멸시켰지만 1020년 사신을 파견해 신하국을 의미하는 번을 자칭, 공물을 보내겠다고 요청한다. 변경의 환란을 막기 위해 의례적 차원에서 요에 사대조공의 형식을 취한 것이다. 그러나 양국 관계는 사신을 억류하거나 입국 거부하는 등 상호긴장관계를 이어갔다. 조정 내에선 화친과 단절이 갈라졌다. 처음에는 외교 단절을 채택해 요 사신의 입국을 거부했지만 결국 1038년 정종4년 양국 백성의 여망대로 화친이 성립됐다.고려는 요의 연호를 사용하고 요에 사대 조공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형식적이고 명목적이었다.

조공하고 책봉을 받은 나라는 원리상 책봉한 나라의 대적국과 외교관계를 가질 수 없었지만 고려는 1078년 요의 대적국인 송과 외교를 재개했다.

12세기 이후 요의 뒤를 이은 여진족과도 서로 평화로운 화친관계를 이뤄냈다. 그러나 13세기 들어 몽골족이 패권을 형성하자 고려 왕실은 혼인관계를 통해 자율성을 확보하지만 몽골 패권 질서의 해체에 따른 국제적 무질서와 폭력에 노출되면서 또 다른 어려움을 겪게 되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조선사회가 등장하게 된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고려의 실상을 자세하고 알기쉽게 서술해 놓았다. 

이윤미 기자/mee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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