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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화문 광장-강태은 프렌닥터연세내과 비만클리닉 부원장] 낡고 빛바랜 내 남편의 ‘노트북’
출근길 하루를 시작하는 많은 남성을 본다. 이렇게 삶에 열중하는 남성의 모습이 돈, 출세, 성공만을 위한 것은 아닌지 비판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를 움직이는 중심에 있는, 냉정한 현실 속에 가려진 ‘사랑’이라는 두 글자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

남자의 깊은 속내엔 굳이 소리 내어 말하지 않는 사명이 있다. 지난해 일상에 지친 필자에게 ‘부부사랑설명서’처럼 다가온 영화 한 편이 있다. 2004년 제작 후 재개봉한 ‘노트북’. 평범한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다. 치매에 걸린 아내는 남편을 알아보지 못하고, 남편은 둘만의 사랑 이야기를 한 권의 노트에 담아 읽어 주며 간호한다. 결국 부부는 가장 평온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한 침대에서 삶을 마감한다.

그 노트의 마지막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난 비록 죽으면 쉽게 잊혀질 평범한 사람일지라도, 영혼을 바쳐 평생 한 여자를 사랑했으니 내 인생은 성공한 인생입니다.” 누가 감히 ‘사랑’을 세상이 말하는 성공에 견줬던가. ‘노트북’ 속 남자 주인공의 한 마디는 우리 삶에서 진정 바라는 성공의 의미를 다시 일깨워줬다.

잘 알고 지내던 40대 초반 ‘사장님’ 이야기를 해 보려 한다. 그는 계산에 능하고 냉철하다. 그가 말하는 대부분은 일, 성공과 관련돼 있다. 그 나이 정도라면 한 아내의 남편이고 한 가정의 가장이지 않을까 싶었다. 좀처럼 가족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기에 결혼을 한 사람이라면, 냉소적 성격 탓에 아내는 참 외로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던 어느날, 영화만큼 감동적인 그의 러브 스토리를 듣게 됐다. “결혼식을 앞두고 제 아내는 갑상선암을 진단받았습니다.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죠. 다행히 극진한 간호 끝에 수술 후 건강을 되찾고 저희는 결혼해서 아이도 낳았죠. 그런데 몇 년이 지나 다시 아내의 병이 재발했습니다. 몇 번의 수술, 중환자실, 항암 치료, 간병까지 감당하는 어려움 탓에 육체적, 정신적, 그 이상의 경제적 부담도 상당했습니다. 전 일을 쉴 수 없었죠. 30대의 밤을 대부분 병원에서 보낸 것 같습니다. 아이들을 키우고 아픈 아내를 지켜내기 위해 정말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렇게 지켜낸 제 아내가 전 정말 소중하네요. 그리고 제 아내를 살려낸 일터를 전 너무 사랑합니다. 지금은 아내와 함께 밥을 먹고, 아내의 잔소리를 받는 이 일상이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 줄 몰라요.”

영화 속 주인공은 현실이 아닐진대, 그 사장은 ‘노트북’ 속 남자 주인공보다 더 빛나고 위대했다. 이후 필자는 수고로운 남편들 안에 꼭꼭 숨겨진 그들의 ‘노트북’을 읽는다. 지치고 힘들어도 최선을 다하는 남성의 끈기 안에는 단단한 사랑의 밧줄이 있음을 이해한다. 그러기에 오늘도 사랑과 성공을 속내에 감추고 묵묵히 일하는 대한민국 남편들의 수고로운 땀을 응원하며, 필자도 스스로 사랑의 ‘노트북’을 채워 보려 한다.

생각해 보니 필자도 연애 시절, 남편과 데이트를 기록했던 노트 한 권이 있었다. 둘만 바라보고 사랑놀이만 하기에는 현실은 각박했다. 아이를 낳았고, 돈을 벌어야 했고, 서투른 사회에서 수백 번 부딪혀야만 했다. 그리고 가족의 생로병사를 함께 겪으며 21년을 함께했다. 인생이 알려 주는 삶의 숙제를 해결하느라, 우리는 잠시 함께 적어 왔던 사랑의 ‘노트북’을 잊고 살았다.

오늘은 21년이 지나 새삼 깨달은 우리 사랑을 ‘노트북’에 적어 보련다. 제목은 ‘반지의 마법’이다. 우리 부부는 지난해 결혼 20주년을 맞아 홍대 앞 노점에서 1만원짜리 스테인리스 반지를 서로 선물했다. 필자는 금속알레르기로 반지를 낄 수 없던 여자다. 그러나 마법이 일어났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손가락에 걸린 20주년 반지를 바라보며, 우리 사랑의 ‘노트북’을 완성하리라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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