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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탄핵 반대 집회서 사망사고 낸 60대에 ‘폭행치사’ 만장일치 무죄
-경찰버스 탈취해 차벽 들이받은 정모 씨 국민참여재판 참관해보니
-차벽 충돌 12분 후 스피커 떨어져 사망…직접적 폭행 보기 어려워
-다만, 특수공무집행방해죄 등 유죄 인정…징역 2년 최종 판결


[헤럴드경제=이유정 기자]“법과 증거에 의하여 진실하게 평결할 것을 엄숙히 선서합니다”

오른손을 든 8명의 배심원이 일제히 일어섰다. 맞은편에는 지난 3월 10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에서 경찰버스를 탈취해 사망 사고를 낸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정모(66) 씨가 고개를 떨군채 앉아 있었다. 

지난 3월10일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 시회 현장 모습.

지난 25일 오전 11시 서울 서초구 법원청사 311호 법정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서울중앙지법 형사33부(부장 이영훈) 심리로 열린 ‘국민참여재판’은 시작 전부터 팽팽한 설전이 예고됐다.

정 씨가 집회 당시 경찰 차량을 이용해 차벽을 들이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로 인해 철제 스피커가 떨어져 누군가가 사망할 수 있다는 것까지 예견할 수 있는가가 쟁점이었다. 주최자나 경찰에는 책임이 없는지 등도 논란이 됐다.

피의자 정 씨는 국민참여재판을 원했다. 일반 국민들이 자신이 처지를 더 잘 알아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날 배심원은 여성 6명과 남성 2명으로 구성돼 있었다. 20대에서 50대까지 연령층은 다양했다. 만 20세 이상 해당 지방법원 관할구역에 거주하는 주민 가운데 무작위로 선정된 결과다. 이들이 과연 정 씨에게 어떤 판단을 내릴지 관심이 집중됐다. 이들의 판단은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재판부에 권고하는 효력을 갖는다. 재판부가 배심원 평결과 다르게 판결하면 그 이유를 판결문에 적시해야 한다.

검찰 측은 먼저 사건의 개요를 설명했다. 지난 3월 10일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이 결정된 직후, 탄핵 반대 집회가 열리던 종로구 안국역 인근에서 발생한 사고다. 정 씨는 이 때 흥분한 나머지 경찰버스를 탈취해 경찰차벽을 수십차례 들이받았다. 그런데 차벽의 충격으로 경찰 소음관리차량의 철제 스피커가 떨어지면서 밑에 있던 사람의 머리에 부딪혔다. 또 다른 집회 참가자였던 김모(77) 씨는 이 사고로 결국 사망했다.

경찰은 정 씨에 특수폭행치사 혐의를 적용했다. 특수폭행치사죄는 위험한 물건을 휴대해 사람의 신체에 폭행을 가하고 사망에 이르게 한 경우에 적용된다. 3년 이상의 징역에 처할 수 있다.

긴장감 감도는 서울중앙지법.

법복을 입고 배심원 앞에 선 서울중앙지검 박철 검사는 “폭행죄는 사람의 신체를 향해 행해진 유형력의 행사로, 반드시 신체 접촉이 있어야만 성립되는 게 아니다”라며 “정 씨는 경찰 버스를 탈취해서 경찰 차벽을 50여차례나 들이받았으며 그 충격으로 소음 관리차의 대형 스피커가 떨어져 무고한 시위 참가자를 사망에 이르게 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정 씨는 김 씨의 사망을 예측하지 못했다고 주장하지만 누군가가 피해를 입을 수도 있겠다는 위험성은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이번엔 변호인이 반격에 나섰다. 정 씨 측 김기수 변호사는 새로운 사실을 제시했다. 그는 배심원을 바라보며 “스피커가 떨어진 건 버스로 차벽을 들이받은 때로부터 약 12분 후”라고 강조했다.

이어 “정 씨가 버스로 경찰 차벽을 들이받을 당시 주위에 있던 경찰과 시위대는 폭행 대상자라 할 수 있지만, 실제 피해자인 김 씨는 그로부터 약 500m 떨어진 위치에 있었을 것”이라며 “10분 이상 경과한 후 마침 스피커 밑을 지나간 피해자가 발생한 불행한 사건”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 씨는 사망한 김 씨를 폭행했다고 보기 어려우며, 소음관리차량의 스피커가 떨어질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주장이다.

검찰과 변호인은 사건 현장을 담은 동영상과 보도 사진을 적극 활용하며 배심원들을 설득했다. 중요한 증거가 될 수 있는 당시 자료들을 좀 더 또렷이 보기 위해 법정 불은 꺼졌다 켜지길 반복했다.

배심원들은 호기심 어리고도 진지한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보며 고민에 잠겼다.

이영훈 부장판사는 “대법원 판례는 폭행 개념에 관해 반드시 신체 접촉이 있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최소한 피해자와 공간적으로는 근접해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며 “폭행의 개념에 피해자 김 씨가 해당되는지 신중하게 논의해볼 필요가 있다. 폭행죄가 인정이 안되면 특수폭행치사도 무죄다”라고 법리를 설명했다.

이날 법정엔 탄핵반대 집회 때 현장을 지휘했던 경찰관 4명도 증인으로 참석했다. 이들은 혼란스럽던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차분히 증언했다.

소음관리차량에 탔던 경찰관 김모 씨는 방송용 스피커가 설마 떨어질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검찰은 배심원 평결에 앞서 정 씨에게 징역 3년을 구형했다. 정 씨는 고개를 숙인 채 잠시 눈물을 훔쳤다. 그는 “우발적으로 저지른 죄에 대해 벌을 달게 받겠다”고 말했다.

최후진술이 끝난 오후 5시30분께 배심원은 평결에 들어갔다. 평결은 약 1시간 반 가량 진행됐다. 저녁 7시께 배심원들이 돌아오자 법정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배심원들의 평결 결과를 확인한 재판부는 최종 선고를 내렸다. “피고인을 징역 2년에 처한다.”

이 부장판사는 “배심원들은 쟁점이 됐던 특수폭행치사죄에 대해선 만장일치로 무죄로 평결했다”고 전했다. 이어 “우리 재판부도 충돌 행위 후 약 10분 정도 지나 스피커가 떨어졌고, 그때 근처를 지나던 피해자에 대해 폭행이 성립된다고 보기 어렵다”며 배심원들의 의견을 수긍했다.

다만 재판부와 배심원은 다른 혐의는 피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 부장판사는 “정 씨가 경찰 버스를 이용해 공무집행을 방해하고 차벽을 손상한 혐의(특수공무집행방해 등)는 유죄가 인정된다. 다만 정 씨가 잘못을 뉘우치는 태도를 보이는 점 등을 참작 한다”며 2년형을 내린 이유를 설명했다.

배심원들은 예비 배심원을 제외한 세명씩 징역 3년과 징역 2년 의견을 냈고, 나머지 한 명은 징역 1년 의견을 낸 것으로 전해졌다.

이 부장판사는 긴 재판을 마무리 한 배심원들에게 “배심원들의 재판 참여가 있어 법원 판결이 국민의 법감정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이뤄지는 것으로 생각한다”며 감사의 뜻을 전했다.

이날 배심원으로 재판에 참여한 사람들에겐 법률에서 정한 소정의 여비가 지급됐다.



kula@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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