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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어준이 2009년 쓴 글 화제 “잘가요, 노무현”
[헤럴드경제=김수한 기자] 고 노무현 전 대통령 8주기 기일을 하루 앞두고 지난 2009년 언론인 김어준씨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접하고 침통함 속에 남긴 글이 화제가 되고 있다.

22일 인터넷 커뮤니티에 따르면, 김어준은 노 전 대통령의 서거가 못내 아쉬운 듯 그와의 기억을 하나하나 더듬고 있다. 2009년 5월27일자 한겨레 [매거진 esc]에 ‘나는 그를 남자로 좋아했다’는 제목으로 기고한 글이다.

추억을 아프게 곱씹던 김어준은 노무현 전 대통령 사진을 인쇄해 붙이고 죽기 전 노 전 대통령이 찾았다던 담배를 작은 상 위에 올려 제를 지냈다.


[사진=인터넷 커뮤니티]


그가 인쇄한 사진에는 “왜 담배가 하필 그 순간에 없었어. 담배도 없이…”라고 씌여 있었다.

김어준은 “이제 그를 보낸다. 잘 가요 촌뜨기 노무현. 남은 세상은, 우리가 어떻게든 해볼게요”라는 썼다.

김어준은 최근 한 인터넷 팟캐스트 방송에서 영결식 때 문재인의 태도를 보고 ‘저 사람이 다음 대통령이다’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당시 영결식에서 고 노무현 대통령 측 상주였던 문재인은 분향하는 이명박 대통령을 향해 돌발적으로 비난이 쏟아지자 이명박에게 고개를 숙이며 양해를 구했다.

김어준은 이와 관련해 ‘김어준이 본 故 노무현 대통령 영결식의 결정적 장면들’이란 글에서 “인상적인 순간이 아니라 인상적인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문재인이다. 서거를 공식 발표하는 최초의 순간부터 백원우 돌발사건으로 이명박에게 고개를 숙이며 양해를 구하는 순간까지, 단 한 순간도 흐트러짐이 없었으며 단 한 번도 경우에 어긋남이 없었다. 참으로 대단하다”고 적었다. soohan@heraldcorp.com

아래는 지난 2009년 김어준이 남긴 글 전문.

두번 만나 노무현에게 반했던 김어준, 책상 위에 담배 한갑을 올리다

1. 그날은 재수학원 대신 당구장에서 종일을 보내던 중이었다.

청문회가 한창이었지만 그 시절 그 신세의 그 또래에게, 5공의 의미는 쿠션 각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러니 그건 순전히 우연이라 하는 게 옳겠다. 수구 앞에 섰더니 하필이면 티브이와 정면이었으니까. 사연은 그게 전부였으니까. 웬 새마을운동 읍네 지부장 같이 생긴 이가 눈에 들어 왔다.

그가 누군지 알 리 없어 무심하게 시선을 되돌리는 찰나, 익숙한 얼굴이 스쳤다. 다시 등을 폈다. 어, 정주영이네. 거물이다. 호, 재밌겠다. 타임을 외치고 티브이로 달렸다.

일해 성금의 강제성 여부를 묻는 질의에 “안 주면 재미없을 것 같아” 줬다 답함으로써 스스로를 군사정권의 일방적 피해자로 둔갑시키며 모두에게 공손히 ‘회장님’ 대접을 받고 있던 당대의 거물을, 그 촌뜨기만은 대차게 몰아세우고 있었다.

몇 놈이 터트리는 탄성. “와, 말 잘 한다.” 그러나 내게는 달변이 문제가 아니었다. 거대한 경제권력 앞에서 모두가 자세를 낮출 때, 그만은 정면으로 그 힘을 상대하고 있었다. 참으로, 씩씩했다. 그건 가르치거나 흉내로 될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그를 알았다.

2. 이후, 난 그를 두 번 만났다. 부산에서 또 실패한 직후인 2000년 봄, 백수가 된 그를 후줄근한 와룡동 사무실에서 만난 게 처음이었다.

낙선 사무실 특유의 적막감 속에 팔꿈치에 힘을 줄 때마다 들썩이는 싸구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그와 마주 앉았다. 그때 오갔던 말들은 다 잊었다. 아무리 기를 써도 기억나는 건, 담배가 수북했던 모조 크리스털 재떨이, 인스턴트 커피의 밍밍한 맛, 그리고 한 문장뿐이다.

“역사 앞에서, 목숨을 던질 만하면 던질 수 있지요.”

앞뒤 이야기가 뭔지, 왜 그 말이 나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그 말을 기억하는 건, 오로지 그의 웃음 때문이다. 정치인들은 누구나 저만의 레토릭이 있다. 난 그런 수사가 싫다. 같잖아서. 저 하나 제대로 건사해도 다행인 게 인간이다. 역사는 무슨. 주제넘게. 너나 잘하셔. 그런 속내.

그가 그때 적당히 결연한 표정만 지어줬어도, 그 말도 필시 잊고 말았을 게다. 정치인들은 그런 말을 웃으며 하지 않는 법이다. 비장한 자기연출의 타이밍이니까.

그런데 그는 웃으며 그 말을 했다. 그것도 촌뜨기처럼 씩씩하게. 참 희한하게도 그게 정치적 자아도취 따위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진심으로 내게 전해진 건, 순전히 그 웃음 때문이었다. 난 그때 그렇게, 그에게 반했다.

두 번째 만남은 그 이듬해 충정로 해양수산부 장관실에서 대선후보 인터뷰로 이뤄졌다. 그 날 대화 역시 잊었다. 기억나는 건 이번엔 진짜 크리스털이었다는 거, 질문은 야박하게 했다는 거 - 그게 그에게 어울리는 대접이라 여겼다. 사심으로 물렁한 건 꼴불견이니까. 그런 건 그와 어울리지 않으니까 - 그리고 이 대목이다.

“시오니즘은 국수주의다. 인류공존에 방해가 되는 사고다.”

놀랐다. 그 생각이 아니라 그걸 말로 해버렸단 사실에. 정치인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안전하지 않은 건 눙치고 간다. 그런데 그는 유불리를 따지지 않았다. 한편으론 그게 현실 정치인에게 득이 되는 것만은 아닌데 하면서도 또 한편으론 통쾌했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닌 거다. 이런 남자가 내 대통령이면 좋겠다고, 처음 느낀 순간이었다.

그 후 대통령으로 내린 판단 중 지지할 수 없는 결정들, 적지 않았으나 언제나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건, 그래서였다. 그는 내가 아는 한, 가장 씩씩한 남자였다. 스스로에게 당당했고 같은 기준으로 세상을 상대했다. 난 그를 정치인이 아니라, 그렇게 한 사람의 남자로서, 진심으로 좋아했다.

3. 그래서 그의 투신을 받아들 수가 없었다. 가장 시답잖은 자들에게 가장 씩씩한 남자가 당하고 말았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억울하건만, 투신이라니.

그게 도무지 받아들여지지 않아 종일 뉴스를 읽고 또 읽었다. 그러다 마지막에 담배 한 대를 찾았다는 대목에서 울컥 눈물이 났다. 에이 씨바… 왜 담배가 하필 그 순간에 없었어. 담배도 없이, 경호원도 없이, 누구도 위로할 수 없는 혼자가 되어, 그렇게 가버렸다. 그 씩씩한 남자를 그렇게 마지막 예도 갖춰주지 못하고 혼자 보내버렸다는 게, 그게 너무 속이 상해 자꾸 눈물이 났다.

그러다 어느 신문이 그의 죽음을 사거라 한 대목을 읽다 웃음이 터졌다.

박정희의 죽음을 서거라 하고 그의 죽음을 사거라 했다. 푸하하. 눈물을 단 채, 웃었다. 그 믿기지 않을 정도의 졸렬함이라니.

그 옹졸함을 그렇게 자백하는 꼴이 가소로워 한참이나 웃었다. 맞다. 니들은 딱 그 정도였지. 그래 니들은 끝까지 그렇게 살다 뒤지겠지. 다행이다. 그리고 고맙다. 거리낌 없이 비웃을 수 있게 해줘서. 한참을 웃고서야 내가 지금 그 수준의 인간들이 주인 행세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게, 뼛속 깊이 실감났다. 너무 후지다. 너무 후져 내가 이 시대에 속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을 정도로.

4. 내가 예외가 없다 믿는 법칙은 단 하나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거. 그가 외롭게 던진 목숨은, 내게 어떻게든 되돌아올 것이다. 그게 축복이 될지 부채가 될지는 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분명하다. 그만한 남자는, 내 생애 다시 없을 거라는 거.

이제 그를 보낸다.

잘 가요, 촌뜨기 노무현.

남은 세상은, 우리가 어떻게든 해볼게요.

PS -
사진 한 장 출력해 붙이고 작은 상 위에 담배 한 갑 올려놨다.

언제 한번 부엉이 바위에 올라 저 담뱃갑을 놓고 오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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