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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봄’을 맞은 늦깎이 작가 3인, 오랜 습작을 펼쳐놓다
-김솔 ‘망상, 어’
일상의 이면 특유문체로 쓴 초단편소설

-박혜상 ‘그가 내린 곳’
세상 밖으로 밀려난 미완성 인생이야기

-윤해서 ‘코러스크로노스’
등단 7년만에 엮어낸 첫번째 소설집


봄은 소설을 읽기에 적당한 계절일까? 그럴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대기가 요동치고, 땅이 들썩거리는 3월이라면, 세상을 바라보는 특별한 시선과 이야기들을 만나보는 것도 괜찮다.

최근 문단에는 다른 일을 하다 뒤늦게 등단한 늦깎이 작가군이 생겨나고 있다. 등단만 늦었을 뿐, 오랜 습작의 내공이 느껴지는 작품들이 시선을 끈다.

 
“모두 망상이야. 네가 살고 있는 곳에선 망상어들이 떼로 몰려다니는 게 틀림없어. 도망치지 않으면 넌 먹이가 되고 말 거야. 나도 그것에 대한 정보를 찾아봤는데, 망상어는 잡식성이어서 개인의 불행 따윈 가리지 않고 입질을 한다고 하더라고.” (‘망상어’에서)

그 중 김솔의 ‘망상, 어’(문학동네)는 일상 속에 흘러다니는 이상한 일들을 특유의 문체로 풀어낸 짧은 소설집이다. 단편소설보다 훨씬 짧은 36개의 이야기는 일상에서 무심히 지나치는, 혹은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의 이면을 유머러스하게 보여준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어떤 물질이나 생물에 확대경을 들이댔을 때 우스꽝스럽거나 기이한 형태를 보이는 것과 같은 효과다.

자신의 새끼인양 순종 치와와를 애지중지하는 장모와 아기를 맡기기 위해 치와와를 떠맡은 맞벌이 부부의 신경전을 그린 ‘교환’, 편두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을 위한 특별한 치료법을 소개한 ‘신경물질’, 방구를 트지 못해 응급실로 실려간 아내 얘기 등은 우습고도 허전하다.

망상이 주제인 얘기들도 있다. ‘환각지통’의 주인공은 이따금 누구나 한번쯤 겪는 휴대전화 환청을 누군가의 몸 속에서 수술 도중 실수로 남겨둔 전화가 울리는게 아닐까하고 상상하는가하면, ‘춤추는 남자’에선 크리스마스 이브에 재즈 바에서 홀로 춤추는 남자가 아내를 죽인 살인범은 아닐까란 공상을 펼친다. 고국 이라크의 현실을 알리기 위해 강력한 우승 후보이면서도 다른 선수들이 결승선을 통과할 때 출발한 모하메드 압둘(‘그들의 올림픽’), 사랑하는 여인을 지키기 위해 전자발찌를 드러내 보여야 했던 남자(‘의심’)처럼 자신의 꿈과 망상을 차압당해야 했던 사람들의 목소리도 담겨있다. 망상은 흔히 엉뚱하고 잘못된 판단이나 착각으로 얘기되지만 작가는 짧은 이야기들을 통해 그것은 다만 웃픈 현실을 벗어나는 길이라는 걸 작가는 따뜻한 시선으로 보여준다.


오랜 공무원 생활을 하다 소설가로 데뷔한 박혜상의 두 번째 소설집 ‘그가 내린 곳’(문학과지성사)은 세상의 바깥으로 밀려난 이들의 인생이야기다. 아무리 애써도 도달하지 못하는, 세상의 기준에서 멀리 떨어진 미완성 인생들이 주인공이다. 철거 입주민, 성소수자, 도피 유학자, 해고 노동자와 가족, 무명소설가와 시인 등 그들은 정착하지 못하고 방랑하고 부유한다. 발을 어디에 딛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이들은 당연히 현재나 미래, 혹은 누군가에 대한 확신이 없다.

가령 단편 ‘Y의 바깥’의 화자인 시인인 나는 소설가 Y의 재개발 철거에 놓인 셋방에 동거하고 있지만 사랑에 대한 확신은 없다. Y가 정부의 지원을 받아 아르헨티나로 떠나는 길에 따라나서지도 않는다. 보상비만 나오면 빨리 청산하고 Y에게 가고자 하지만 Y로부터 사랑에 빠졌다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메일을 받는다.

Y는 소설가를 부르는 명칭이지만 누군가를 꼭 집어 지칭하는 건 아니다. 작가는 Y의 형상을 이렇게 표현한다. “Y는 바깥을 꿈꾸는 형상이다. 그것은 달아나지 못하는 나무였다가 나비처럼 날아오르는 은행잎, 찰나를 꿈꾸는 토마스이기도 하고, 사라진 비탈나무이기도 하고…”

단편 ‘사랑의 생활’에는 혼자서도 잘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등장한다. 여기에 아이러니가 있다. 혼자서도 잘하는 사람들이 왜 굳이 모이는 걸까. 극중 인물 케이는 “사람들은 고독도 전시하려”한다고 말한다.

이번 소설집에는 글쓰는 이들이 곳곳에 등장하는데 이들은 종종 쓰지 못하고 떠난다. 유예하고 지연된 시간을 통해 이들은 다른 것을 발견한다. 답답한 현실을 그려내는 작가 특유의 거리두기 방식으로 이야기를 끌고가는 담담한 서술이 인상적이다.


소설가 윤해서의 ‘코러스크로노스’(문학과지성사)는 2010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해 7년만에 엮어낸 첫번째 소설집이다.

코러스크로노스는 시간합창이란 뜻. 작가는 시간과 시간이 얽히고 교차하는 시간을 혼돈이라 하지 않고 합창이라 불렀다. 코러스크로노스는 단편 ‘레 포케레케레’에 나오는 재건축이 결정되기도 전에 무너져버린 듯한 허름한 건물 지하에 있는 방이기도 하다. 노래방도 PC방도 아닌 목적을 알 수 없는 공간이 시간의 이름을 갖고 있다는 것도 흥미롭다.

단편 ‘오늘’은 사라지기 시작하는 사람의 얘기다. 조연배우인 남자는 바이크를 타다 뺨에 상처가 나고 몸에 멍이 든다. 분장팀의 도움을 받으려고 일찍 촬영장에 도착한 남자의 얼굴에서 밴드를 떼내자 상처는 온데 간데 없다. 그때부터 하나씩 몸을 형성하고 있는 것들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어깨의 주사자국, 오른쪽 눈꼬리에 있던 점, 손금과 지문, 목의 주름 등 모든 금들이 사라진다.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싶다는 사람이 나타나고 취재진들이 몰리고 PD들의 전화가 쏟아진다. 그가 유명세를 탄 건 데뷔 이래 처음. 조용하던 며칠이 지나고 사라짐은 가속도가 붙는다. 그는 거울 속에 낯선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두려움과 외로움을 느낀다. 눈 앞에서 세계가 사라진 것이다. 신체와 장기들이 하나하나 사라지고 마침내 심장이 사라지기 직전, 심장이 멈춘다. 그리고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는 죽었지만 그의 죽음을 증명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의 사인을 뭐라 불러야 할까.

기묘한 소설들은 서사보다 시간과 공간, 사물과 사람의 경계에 대한 사유로 읽힌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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