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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이프 칼럼-이명옥 사비나미술관장] 그리지 않은 그림과 블랙리스트
약 1만명에 이르는 문화예술인들의 블랙리스트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사실이 특검수사로 드러났다.

정치적 성향에 따른 검열 및 지원배제가 국가권력에 의해 이뤄졌음을 보여주는 블랙리스트는 현대독일작가인 지그프리트 렌츠의 소설 ‘독일어 시간’을 떠올리게 한다.

소설 속 이야기와 블랙리스트는 유사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소설의 배경은 나치 히틀러 정권 말기인 1943년, 북독일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지방의 작은 마을 루크뷜의에 사는 화가 난젠에게 창작금지 명령이 내려진다.

탄압의 근거는 난젠의 예술세계가 나치 정권의 통치 이념에 위배된다는 것.

난젠의 오랜 친구이자 루크뷜의 파출소장인 예프젠이 창작금지 명령을 이행하는 감시자 역할을 맡게 된다. 예프젠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나치의 부역자인데도 일말의 죄의식도 갖지 않고 권력이 부여한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한다.

그는 국가의 명령에 복종하는 태도가 공직자의 의무라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소설에는 인간적 양심을 대변하는 또 다른 인물이 등장하는데 바로 예프젠의 아들 지기다. 지기는 아버지로부터 난젠을 감시하라는 명령을 받지만 양심의 가책을 받고 화가가 몰래 그린 그림들을 보호하고 숨기도록 도와준다.

필자는 창작활동의 자유를 억압받는 예술가와 국가권력의 갈등을 그린 소설이 낯설지 않았다.

한국판 블랙리스트 사건에서 난젠과 옌스, 지기와 같은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이 소설은 허구가 아니라 역사적 사건을 바탕으로 창작되었다.

국가권력에 의해 탄압받는 화가 난젠의 모델은 독일표현주의 대표화가인 에밀 놀데다.

나치는 놀데를 ‘퇴폐미술가’로 낙인찍어 작품 활동마저 금지시켰다.

1937년, 나치정권은 독일 국민의 정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명분을 내세워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현대미술작품들을 강제로 몰수해 ‘퇴폐예술 전’이라는 해괴한 이름을 붙이고 뮌헨을 시작으로 여러 도시에서 순회전시를 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놀데를 비롯한 현대미술사의 거장들을 퇴폐예술가로 분류해 창작금지 명령을 내리고, 작품을 압수하거나 파괴하고, 강제로 국외로 추방하는 등 갖은 박해를 가했다.

소설에서 난젠은 현대미술의 흑역사를 이렇게 고발한다.

‘저들은 아마 방해를 하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겠지… 하지만 저들은 이걸 알아야 될 거야. 원치 않는 그림에 대해 금지시킬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이 바보들은 또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림이 있다는 걸 모르고 있단 말이야’

실제로 놀데는 감시의 눈을 피해 많은 그림을 그렸고, 오늘날 이 그림들은 ‘그리지 않은 그림들’로 불리고 있다. 문득 필자는 이런 궁금증이 생겼다.

블랙리스트 주도자들이 현대미술사를 공부했다면 이토록 어리석은 일을 벌일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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