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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朴대통령은 아버지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다
오늘 오후 국회 탄핵표결

아버지 고향 경북구미서 정치입문

‘친박’ ‘부친 사람’ 양대축에 기대

충성 아니면 배신 철저한 이분법

관제형 정책-대결위주 남북관계

통제형 언론-교육정책도 도마위

결국 자기사람 때문에 탄핵까지

18년 정치생활 오욕으로 막내려


결국 어머니의 올림머리를 풀지 못했고, 끝내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다. ‘정치인 박근혜’의 영광과 비극이 모두 이로부터 비롯됐다. 9일 박근혜 대통령은, 더이상 아름다운 퇴장을 허락하지 않는 정치인생의 마지막 무대로 올랐다. 이날 박 대통령은 헌정사상 두번째로 국회 탄핵소추안 표결에 의해 운명이 갈리는 최고통치권자가 됐다. ▶관련기사 2·3·4·5·6·8·9면 


영애(令愛)에서 퍼스트레이디 대리, 국회의원을 거쳐 최고권좌인 대통령까지 오른 ‘정치인 박근혜’의 인생은 아버지와 그 지지자들이 구축한 ‘신화’로부터 끝까지 자유롭지 못했다. 어머니 고(故) 육영수 여사의 ‘국모’ 이미지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지배했고,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개발 신화’에 대한 강력한 향수가 정치와 통치 행위를 옭아맸다. 청와대에서 보낸 20대 시절 양 부모를 총탄에 잃은 비극적인 딸은 정치를 충성과 배신이라는 이분법의 언어로 이해했다. 인사는 공사(公私) 없이 김기춘ㆍ최태민ㆍ최순실 등 선친대로부터 내려온 인맥에 고착됐다. 경제정책은 ‘새마을 운동’ ‘경제개발 5개년 계획’ ‘한강의 기적’으로 대표되는 60~70년대 성장 신화의 재현에 바쳐졌다. ‘관 주도의 동원체제’와 ‘정경 유착’이 그 이면이었다. 남북관계는 ‘대치’일로였고, 언론과 교육은 ‘통제와 관리’의 대상이 됐다.

▶아버지 고향에서 정치입문, ‘충성’과 ‘배신’의 이분법=박 대통령의 정치인생은 지난 1997년 11월 한나라당 입당으로 시작된다. 그해 대선 직전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가 지원을 요청하자 아버지의 고향인 경북 구미 지구당에 입당 원서를 제출한 것이다. 이듬해 대구 달성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된다. 아버지의 고향은 곧 박 대통령의 정치적 심장부가 됐다. 박 대통령 정치적 생명의 시작과 끝이 대구ㆍ경북에 있었다. 탄핵까지 오게된 데는 TK에서의 민심 이반이 결정타로 꼽힌다.

박 대통령에게 정치란 대결과 승부였고, 충성 아니면 배신이었다. 2000년 한나라당 부총재에 당선되고, 2001년엔 이회창 총재에 반발, 당 개혁을 요구하다 결국 탈당, ‘미래연합’을 창당했다. 2002년 재입당한 박 대통령은 불법대선자금과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한나라당이 위기에 처한 2004년 3월 대표를 맡아 천막당사 시기의 당을 이끈다. 2007년 처음으로 대권에 도전해 이명박 후보에게 패한다. ‘친박’이라는 계파가 정치권에서 시민권을 얻은 게 이때다. 2011년 비상대책위원장을 맡고 2012년 대선에 출마, 당선된다.

박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사람이 사람을 배신하는 일만큼 슬프고 흉한 일도 없을 것이다. 한번 배신하고 나면 그 다음 배신은 더 쉬워지면서 결국 스스로에게 떳떳하지 못한 상태로 평생을 살아가게 된다”고 했다. 박 대통령은 2015년‘원조 친박’이었던 유승민 원내대표를 ‘배신의 정치’라고 일컬으며 결국 중도하차시킨다. 지난 2006년엔 노무현 대통령의 공개 개헌 제안에 대해 “참 나쁜 대통령”이라고 했다. 철저한 이분법에 기반한 ‘박근혜의 정치’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박근혜 정치’의 두 축, ‘친박’과 ‘아버지의 사람들’=최순실 국정농단의 또 다른 주역으로 의혹을 받고 있는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박정희 정부에서 중앙정보부와 청와대에서 근무하며 유신헌법을 기초한 인물로 꼽힌다. 국정농단 사태의 주범으로 지목되는 최순실씨는 박정희 정부에서 정재계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던 종교인 최태민씨의 딸이다. ‘박근혜 정치’의 인적인 기반은 선친대의 인맥과 2004년 당대표 시절 이후 형성된 ‘친박’이다. ‘친박’은 ‘원조’였던 김무성 새누리당 전 대표나 유승민 의원 등이 이탈하는 등 10여년 동안 구성원이 다양하게 교체됐지만, 지난 4ㆍ13 총선까지 한국 정치의 가장 영향력 있는 계파였다. 박 대통령은 집권 이후에도 정치적으로는 ‘친박’에 의존하는 한편, 최고통치권자로서의 행위에선 ‘비선실세’를 활용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박정희 정부 시대 최태민씨로부터 내려온 사연(私緣)을 공식 통치행위에 동원하고, 정치적으로는 계파에 철저하게 기댄 것이 박근혜 정부 실정의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힌다.

▶관제 동원형 경제정책, 대결 위주 남북관계, 통제관리형 언론ㆍ교육정책=미르ㆍK스포츠재단의 대기업 모금과 창조경제ㆍ문화융성 사업, 개성공단 폐쇄와 사드(THAADㆍ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배치 등 대북정책, 세월호 참사 언론대응, 국정교과서 추진 등에서도 박정희 전 대통령의 ‘그늘’이 깊게 드리워져 있다. 최순실씨가 배후에서 설립을 주도하고, 청와대가 대기업에 압력을 넣어 기금을 모금했다는 의혹의 미르ㆍK스포츠 재단은 ‘정경유착’의 산물로 꼽힌다. 창조경제와 문화융성 사업은 철저하게 관 주도의 민간 동원 체제로 추진됐다. 개성공단 폐쇄와 사드 배치 등 대북 정책은 대결 위주였고, 위협과 공포를 강조하는 안보정책은 통치 행위의 중심이 됐다. 고(故) 김영한 민정수석의 비망록에는 김기춘 전 비서실장 주도로 세월호 참사를 비롯한 국가 재난 사태에서 언론과 여론을 통제하려 한 정황들이 담겨 있다.

결국, 이번의 탄핵 사태는 60~70년대 아버지의 신화를 재현하려는 박근혜 대통령의 모든 시도와 노력이 21세기의 대한민국에는 결코 맞지 않는 옷이었음을 보여줬다.

이형석 기자/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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