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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더스카페]혼돈의 시대, 슈미트에서 비범한 리더십을 읽다
[헤럴드경제=이윤미 기자] 지난해 96세를 일기로 타계한 헬무트 슈미트 전 독일총리는 ‘독일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정치인’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동서독 교류를 지속적으로 확대함으로써 독일 통일을 앞당기는데 기여했을 뿐만아니라 유럽통일과 보편적 복지를 일궈내는데 그의 역할이 적지않다. 여기에 해박한 지식과 언변, 런던 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 협연할 정도로 뛰어난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던 그는 역대 독일 총리 중 최장수 정치인에 오르기도 했다.

그의 행보 중 가장 많이 회자되는게 1977년 적군파가 루프트한자 민항기를 납치하자 특공대를 급파해 테러리스트를 소탕하고 승객 전원을 무사히 구출한 사건이다. 헬무트는 당시 책임자에게 헌법을 벗어나는 결정까지 가능한 전권을 위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만큼 상대방을 신뢰했다는 얘기다.

정치인으로서 그가 평생 신조로 여겨온 기둥은 도덕성과 책임이었다.

정치와 외교 현장을 누비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가 타계 직전에 쓴 ‘구십 평생 내가 배운 것들’(바다출판사)은 그에게 영향을 미친, ‘모범이 될 만한’ 역사적 인물들과 매혹적인 예술작품, 세계관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책 등 그가 살아오면서 만났던 중요한 만남들을 담고 있다.
[사진=구십 평생 내가 배운 것들/헬무트 슈미트 지음,강명순 옮김,바다출판사]

슈미트는 그의 인생에 처음으로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꼽았다. 열댓살 때 견진성사를 받던 날, 선물로 받은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 그는 단박에 경도됐다. 그는 ‘명상록’을 읽은 순간의 감동을 한마디로 이렇게 표현했다. “나도 이 사람처럼 되고 싶다”.

그는 전쟁터에도 ‘명상록’을 품고 갔고, 평생 수시로 아무 장이나 펼쳐 읽곤 했다. 그를 송두리째 흔든 건 아우렐리우스가 성찰의 핵심으로 삼은 두 가지 덕목이었다. 바로 심리적 냉철함의 유지와 무조건적인 의무이행이다.

“냉철함은 섣부른 결정으로 인한 과오를 막아준다. 냉철함은 행위의 조력자로서 이성을 사용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심리적 냉철함을 유지하는 자만이 이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29쪽)

그는 집과 사무실 책상에 아우렐리우스의 피규어를 두고 바라보며 이 두가지 계율을 늘 마음에 새겼다.

슈미트는 1966년 한 텔레비전 대담에서 그가 생각하는 모범적인 인물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고 즉흥적으로 세사람을 꼽은 적이 있다. 바로 토머스 제퍼슨, 교황 요한 23세, 존 F. 케네디.

그는 케네디에 경탄하게 된 결정적 사건으로 러시아가 체면을 구기지 않고 쿠바 위기를 슬기롭게 해결한 일을 들었다. 베를린 장벽 건설 때 보인 무반응, 쿠바 위기의 탁월한 해결만으로 그를 정치지도자라고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케네디는 확실히 내가 갖고 싶었던 엄청난 카리스마의 소유자였다”며, 그의 명연설을 자주 인용했다고 털어놨다.

독일인들의 그릇된 모범으로는 프리드리히 2세와 비스마르크를 들었다. 그는 이 두 인물에 대해 전쟁을 일삼고 독일인들의 이익 대신 단지 호엔촐레른 왕가의 이익을 위해 일했다며 혹평했다. 특히 비스마르크가 독일 통일을 이룬 위대한 구원자로 여겨지는데 대해 그는 독일인들이 현혹돼서는 안된다고 충고한다. 윈스턴 처칠도 헬무트의 모범적 인물 리스트에 포함됐다.

그는 다양한 독서를 통해 자신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선택적으로 취했다. 그 중 칸트의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 베버의 ‘직업으로서의 정치’, 포퍼의 ‘열린사회와 그 적들’은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칸트의 ‘영원한~’에서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들 중 하나는 도덕적 행위는 이성에 근거해야 한다는 인식”이었다고 털어놨다. 그는 중대한 정치적 결정을 내릴 때마다 늘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근거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나치가 남겨놓은 도덕적 혼돈 속에서 도덕과 이성은 그의 정치인생의 나침반이었다.

하지만 그는 현실정치에서는 실용주의자, 절충주의자였다. “정치란 도덕적 목적을 위한 실용주의적 행위이며 국민간의 합의는 자연상태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항상 새롭게 구축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단적인 예가 총리시절 이혼,낙태 등의 개혁법안을 둘러싸고 교회, 기민당과 벌인 이른바 ‘근본가치 논쟁’.그는 반대파에 맞서 국가의 임무는 국민을 정신적으로 인도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헌법에 규정된 기본권을 수호하는 것임을 내세우며 물러서지 않았다.

슈미트는 막스 베버의 책에선 정치가의 도덕적 책임의 중요성을 취했다. 베버는 그의 책에서 “정치란 열정과 균형감각을 갖고서 단단한 널빤지에 강하게 그리고 서서히 구멍을 뚫는 작업”이라고 했다.

슈미트는 자신이 영향을 받았다고 털어놓은 인물들에 대해 인간적인 약점은 접어뒀다.

슈미트의 모범적 인물 리스트는 그가 얼마나 정치가로서 냉철한 이성과 도덕적 책임감을 중시했는지를 보여준다.

냉전으로 인한 이데올로기 대립, 오일쇼크로 인한 경제난, 실업난, 테러 위협으로 대내외적으로 어려웠던 1970년대, 그가 보여준 리더십은 오늘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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