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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플&스토리] “갈등의 한반도 ‘우분투 정신’이 필요하다”
위안부 문제에서 남북관계·국제통상법까지 평화외교 위해 ‘고군분투’…국제법의 권위자 이장희 외대 명예교수의 ‘동아시아 협력·평화론’



‘오전 10시 대학원생들과 국제법연구 포럼, 정오 12시 언론 인터뷰, 오후 3시 민주평화포럼 운영위원회, 오후 7시 남북경협 법률아카데미 개강식’

노 교수의 수첩은 오늘 하루 소화해야할 일정들로 빽빽하다. 국내 국제법 권위자인 이장희(66) 한국외국어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지난해 정년퇴임 이후 여전히, 아니 오히려 그동안 미뤄왔던 만남과 일정이 늘어나면서 한층 더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한국외대 명예교수, 아시아사회과학연구원 원장, 평화통일시민연대 상임공동대표, 남북경협국민운동본부 상임대표, 세계역사NGO포럼 이사장, 동아시아역사네트워크 상임공동대표….

수첩의 일정만큼이나 빼곡하게 그의 명함에 새겨진 직함은 그의 폭넓은 관심사와 활동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이 명예교수의 활동영역은 국내에만 그치지 않는다. 2006년부터 헤이그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 재판관을 역임하고 있는 그는 올해 들어서만 네덜란드와 남아프리카공화국, 이탈리아 등을 오가며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또 21일 경북대에서 열리는 대한국제법학회에서 정년기념 논문 봉정식을 갖는다.

헤럴드경제는 가을이 깊어가는 10월 중순 서울 회기동에 자리한 연구실에서 그를 만났다.



-정년 후에 더 바쁘게 지내시는 것 같습니다.

▶1975년부터 국제법을 공부하기 시작해 올해 40년째 됐는데 아직도 부족한 부분이 많네요. 또 국제법을 공부하면서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에 대한 관심이 생겨 여기저기 발을 들여놨는데 부르는 사람도 있고, 찾아갈 곳도 많아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동안 연구와 강의 핑계로 못 만난 사람 만나고 못했던 일도 해야죠.



-교수님이 국제법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요?

▶솔직히 대학 학부시절에는 국제법에 관심을 갖지 못했습니다. 너무 이론적이기도 했고 사법시험과목도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대학원 진학한 뒤 우연히 재일동포 한국 유학생을 만나게 됐는데 일본에서 벌어진 재일동포 지문날인과 외국인등록법 등에 대해 전해 듣고 국제법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젊은 시절 일본의 재일동포에 대한 민족차별정책과 한국 정부의 무관심에 분노를 느끼게 되면서 석사논문도 ‘소수민족의 국제적 보호조약’으로 쓰게 됐죠. 당시 젊은 생각으로 재일동포를 도울 수 있는 길은 일본의 행위가 국제법에 위반된다는 사실을 국제사회와 일본, 한국에 알리고 여론을 환기시켜 개선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또 이후 독일로 유학가서 네덜란드, 스위스 같은 유럽 국가들이 국제법을 활용해 작지만 강한 국가로 성장한 것을 보면서 다시 한번 국제법의 중요성을 깨닫고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국제법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21세기가 됐지만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는 대한제국 말엽과 대단히 유사합니다. 일본 아베정권의 역사왜곡, 일제식민지 미화, 남북관계, 북핵문제, 한일 간 독도문제 등 위태로운 동북아정세 속에서 국제법은 유용한 해결책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외교가 할 수 있는 일은 너무 한정돼 있지 않습니까.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네덜란드, 스위스가 작지만 강한 나라로 성장할 수 있었던 힘은 외교의 힘이었는데 외교의 힘이라는 것은 결국 국제법적 논리입니다. 국제사회가 아무리 정글의 법칙이 작용하는 곳이라고 해도 강한 국제여론이 바탕이 된다면 함부로 힘만을 내세울 수 없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만 하더라도 아쉽기는 하지만 이만큼 오게 된 것은 국제법을 통해 국제여론을 이끌어냈기 때문이었습니다.



-교수님은 지난 2011년부터 외교부 위안부문제TF 자문위원으로도 참가하고 계십니다. 한국과 일본 정부의 지난해 12ㆍ28 합의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고 계십니까?

▶제가 위안부문제TF 자문위원이긴 하지만 이번 12ㆍ28 합의를 앞두고 TF 자문위원을 부른 적이 없습니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개인이나 국가 간 합의가 유효하려면 하자가 없어야하고 진정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12ㆍ28 합의는 피해자 구성원의 의견수렴 등 아쉬운 대목이 적지 않습니다.



-교수님은 국제법 전문가이시면서도 남북문제를 비롯해 한반도문제에도 관심이 많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는지요?

▶국제법이란 학문 자체가 단순히 조약이나 규약만 봐서 되는 게 아니고 그것이 맺어진 배경이나 전쟁사 등을 알아야 보다 심층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학문입니다.

특히 분단국이면서도 강대국에 둘러싸인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안보외교가 절실한데다, 무역의존도가 커 통상외교도 매우 중요한 나라입니다. 분단극복과 동아시아 지역협력ㆍ평화, 그리고 국제통상외교를 위해서는 힘의 외교가 아닌 평화의 외교에 매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평화외교의 핵심이 국제법입니다.

남북, 한반도, 나아가 동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평화입니다. 아시다시피 아시아는 인구나 경제력은 물론이고 정신적ㆍ물질적 측면에서도 국제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기반을 다 갖추고 있는데 현실적으로는 그에 걸맞은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현재만이 아니라 과거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시아지역이 유럽이나 북미, 남미, 아프리카와 달리 지역협력ㆍ평화를 이루지 못하면서 결국 유럽세력에 의해 식민지 지배라는 고통을 받지 않았습니까.

저는 동아시아가 지역협력ㆍ평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은 한반도 분단과 일본 제국주의가 남긴 유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아시아 지역협력ㆍ평화를 위해 반드시 극복해야 할 과제입니다.



-교수님도 종종 지적하셨지만 국제법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 관심은 그다지 크지 않은 게 현실인데요.

▶로스쿨이 도입된 이후 국제법은 찬밥신세죠.(웃음) 국제법 전문가 양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대단히 잘못된 일입니다. 국제법학계의 UN총회라고 할 수 있는 세계국제법협회(ILA)가 지난 2010년 헤이그에서 정기회의를 가졌는데 일본에서 44명, 대만에서 30명이 참가한 반면 한국은 8명에 그쳤습니다.

일본이 독도 영유권 문제를 자꾸 국제사법재판소(ICJ)로 끌고가려고 하는 것도 그만큼 국제법에서 자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유감스럽게도 국제법 분야에서 아시아 몫의 대부분은 일본과 인도, 중국이 차지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훌륭한 국제법 인재를 키워 대외적으로 제대로 설명하고 설득하는 일은 절실한 과제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정년퇴임도 했으니 국제법외교아카데미를 설립해 인재 양성에 기여하고 싶습니다. 우리나라에 꼭 필요한 일입니다.



-지금 국내정치는 물론 남북관계를 비롯한 한반도정세와 동북아정세 어느 하나 쉬운 게 없어 보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필요한 시대정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지난 8월 세계국제법협회 연차학술대회 참석차 남아공의 요하네스버그를 방문한 일이 있었는데 여기서 ‘우분투’(ubuntu)라는 말을 인상 깊게 접했습니다. 넬슨 만델라의 정신이기도 한데요. 남아공의 반투족 말로 “네가 있기에 내가 있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불행한데 나만 혼자 행복해질 수는 없다는 의미죠. 우분투 능력을 갖게 되면 타인에 대한 관용과 공감능력이 생긴다고 합니다. 여러 갈등이 중첩한 한반도야말로 우분투 정신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한반도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의 지역협력ㆍ평화를 위한 시대정신도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대원 기자/shindw@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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