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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월요광장] 옥시와 폴크스바겐 그리고 규제정책의 후진성 -정용덕 서울대 명예교수
1980년대 말 시카고대에서 런던정경대로 자리를 옮긴 브라이언 배리라는 학자가 있었다. 영국학자들의 미국행 두뇌유출이 한창이던 때라서 그의 역이민이 화제가 됐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유권자들의 투표행위를 설명하기 위한 두 이론을 제시했다. 하나는 자신의 한 표가 선거결과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하기 때문에 유권자들이 기권할 것으로 보는 ‘합리적 선택론’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많은 유권자들이 선거에 참여하는 ‘투표행위의 역설’이 발생한다. 민주시민이라면 투표해야한다는 규범의식 때문이라는 ‘사회문화결정론’이 성립하는 근거다. 그러나 비가 오는 날의 낮은 투표율, 후보 간 경쟁이 치열하거나 정당 간 정책 차가 클수록 투표율이 높은 현상은 문화 보다 개인의 합리적 선택이 작용한 결과로 설명해야 한다. 결국 사람들은 그가 속한 사회에 배태된 규범과 자신의 이익추구 사이에서 여건에 따라 행동한다는 것이다.

최근 영국기업인 옥시레킷벤키저의 가습기 살균제 참사와 독일기업인 폴크스바겐의 불성실한 불량자동차 보상 문제를 겪으면서 떠오른 두 에피소드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는 다니엘 튜더라는 영국 이코노미스트지 전 서울 특파원이 쓴 옥시관련 칼럼이다. ‘지한파’로 보이는 그 기자는 옥시레킷벤키저가 “영국에서라면 생각도 못할 부끄러운 짓을 한국에서 저질렀다고 의심해야 하는” 상황을 곤혹스러워했다. 그리고 그 기업이 그런 문제를 일으킨 원인이 한국 내부, 즉 “안전에 대한 규제를 싫어하는” 정부에 있음을 지적한다.

또 다른 에피소드는 베를린 체류 시 직접 겪었던 일이다. 운전 중에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어 멈춰 섰을 때 뒤따르던 차가 추돌한 것이다. 당황한 나머지 서툰 독일어보다는 조금 편한 영어로 보상을 요구했다. 그는 필자가 급정거하는 바람에 사고가 났노라고 역시 능숙한 영어로 주장했다. 차간거리 유지를 지키지 않은 것이 원인이라는 필자의 대응에 그는 순간적으로 얼굴을 붉히더니 빠른 독일말로 자신의 주장을 계속했다. 필자의 신고로 도착한 경찰은 독일어로 그 운전자와 대화를 나누더니, 이내 필자의 잘못으로 결정을 내리고는 서둘러 마무리 했다. 독일이라는 나라가 기껏 이 정도인가 실망하면서, 우리로 치면 사법서사 정도로 소박한 규모의 동네 변호사 사무실을 찾았다. 그 변호사는 필자가 억울하게 당한 모든 문제를 간단명료하게 해결해 주고 두둑한 보상까지 받아 줬다. ‘법치국가’ 독일을 확인하는 계기였다.

프랑스와 더불어 근대 문명을 선도한 영국이요, 그것을 ‘물질문명’으로 격하하면서 게르만의 ‘고결한’ 정신문화를 내세운 독일이다. 그러나 그 개별 국민이나 기업은 주어진 여건 하에서 자익을 극대화하는 합리적 행위자에 불과하다. 옥시가 문제 상품의 판매를 영국과 한국에서 차별한 것, 폴크스바겐이 불량품 보상에서 미국과 한국을 차별한 것은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그런 여건을 제공했기 때문에 비롯된 것 아닐까 자성하게 되는 이유다.

기업들이 국민건강을 해치면서까지 이익을 추구하지 못하도록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수준의 규제입법이 마련돼 있는지, 있다면 그 법이 철저히 집행되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어찌 했기에 외국기업들이 우리를 이리 만만히 보고 문제를 유발하고, 그러고도 여전히 잘못을 부인하며 버티는 것인지, ‘규제혁파’라는 다소 과격한 슬로건까지 내걸 만큼 규제가 넘친다면서, 정작 국민 안전에 대한 사회규제는 이처럼 허술했다는 것인지 궁금하다. 아직도 경제성장을 위해 보건위생, 환경, 청소년 게임중독 등 국민 삶의 질은 희생돼도 좋다는 정책기조가 유지되고 있는지 걱정스럽다. ‘국민행복시대’라는 집권행정부 슬로건이 공허하기 짝이 없는 오늘 한국사회의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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