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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난과학] 1.1㎞ 슈퍼 현미경으로 들여다 본 미시세계
[헤럴드경제(포항)=이정아 기자] 인간의 몸에 바이러스가 침투합니다. 인간은 강력한 면역물질을 분비해 바이러스를 물리치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면역력이 약해진 인체는 끝내 적을 막아내지 못합니다. 바이러스는 인체 내 얇은 세포막을 뚫고 내부로 침입합니다. 미생물과의 전쟁에서 진 인간, 끝내 병에 걸리게 됩니다.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바이러스가 인체 내 세포를 둘러싸고 있는 세포막을 어떻게 파괴시키는지를 알아야겠죠. 그래야 신약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단백질 구조는 단 5%. 과학기술이 제아무리 발전했다지만 우리는 몸속에 있는 단백질 세포막이 어떻게 형성되는지조차 거의 모르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단분자 단백질이나 살아 있는 세포와 같이 아주 작은 단위까지 꿰뚫어보는 능력이 필요한데요.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방사광가속기입니다. 방사광가속기는 일종의 슈퍼 현미경인 것입니다.

4세대 방사광가속기로 나노초의 1000만 분의 1초인 펨토초 단위까지 관측할 수 있게 됐다.

지난 22일 경북 포항시 4세대 방사광가속기 건물 내부를 취재했습니다. 가속기 건물의 직선 길이만 1.1㎞, 단일 과학 실험장비로는 국내 최대 규모입니다. 4세대 가속기를 짓기 위해 가속기추진단 연구진들은 암반이 드러날 때까지 10여m 땅을 판 뒤 콘크리트를 채워야 했습니다. 이때 쏟아부은 콘크리트 양은 지상 30층짜리 아파트(60세대 기준) 75동을 지을 수 있는 양과 맞먹습니다.

지난달 14일 연구진은 자유전자레이저를 발생시키는데 성공했다. 시운전 시작 후, 단 두달 만에 성공했는데 이는 세계 최단기간이다.

건물 내 7대의 모니터와 각종 스위치로 가득한 조종실을 지나자 두께만 2m에 이르는 거대 철문이 보였습니다. 철문은 실험 도중 발생할 수 있는 방사선 등이 외부로 유출되지 않도록 설계됐습니다. 철문을 지나 가속기 내부로 들어서자 각종 장비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늘어져 있었습니다. 고인수(포스텍 물리학과 교수) 4세대 방사광가속기구축추진단 단장은 “포항가속기연구소는 1990년대 초부터 가속기를 운영한 경험이 있었고, 또 4세대 가속기를 지을 수 있는 상당히 넓은 부지를 확보하고 있었다”며 상대적으로 쉽게 4세대 가속기 건설을 시작할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4세대 방사광가속기 전경
건물 길이만 1.1km에 달하는 슈퍼현미경, 4세대 방사광가속기 내부

방사광가속기는 전자총을 쏘는 데서 시작됩니다. 활시위를 당기듯 발사된 전자는 빛의 속도로 달리다가 라인 옆에 붙어있는 자석과 만나면서 100억 전자볼트, 즉 1.5볼트 건전지 66억 개에 해당하는 에너지를 만들어냅니다. 이렇게 가속된 전자는 저장링으로 들어가 N극과 S극이 짧은 거리로 교차돼 있는 영구 자석을 지나면서 좌우로 빠르게 진행 방향이 바뀌게 되는데요. 이때 레이저 빛 형태를 띠는 4세대 방사광이 배출됩니다. 

전자총(사진)에서 레이저가 금속 표면에 조사되면 전자가 방출된다. 레이저의 길이만큼 짧은 전자빔이 발생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빛을 실험장치까지 이동시키는 관이 빔라인입니다. 이 빔라인을 통해 수많은 과학자들이 각자 원하는 파장과 원하는 밝기 등 맞춤형 방사광을 얻어 연구를 할 수 있습니다. 4세대 가속기는 3세대 가속기 보다 100억 배 밝은 강력한 빛을 낼 수 있기 때문에 연구자들은 나노초(10의 마이너스 9승)의 1000만 분의 1초, 즉 펨토초(10의 마이너스 15승) 단위까지 관측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는 찰나보다도 빠른 1000조 분의 1초의 현상을 느린 화면으로 들여다볼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방사광이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곳. 동그란 모양의 XPP 고니오미터 내에 샘플을 삽입하면 된다.

미국과 일본에 이어 세계 세 번째로 운전을 시작한 국내 4세대 가속기는 단분자 단백질이나 살아 있는 세포의 움직임을 들여다 볼 수 있기 때문에 획기적인 신약을 개발하는데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또 이 기술을 통해 신물질과 신소재를 분석해 원천기술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고 단장은 “지금 현대나 BMW 등이 수소연료전지를 이용한 차량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데, 방사광가속기를 통해 물에서 수소를 떼어내는 연구에 성공하게 되면 많은 경제적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덧붙였죠.

특히 이번 포항 4세대 가속기 건설에는 300여 개 국내기업이 참여해 핵심장치의 약 70%를 국산화했습니다. 고 단장은 “‘국산화에 성공하면 당신의 회사도 함께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는 말 한 마디로 부품 업체들을 설득했는데 업체 대표들이 묵묵히 따라와 줬다”며 “짧은 기간 안에 저렴한 가격으로 일본 부품보다 성능이 뛰어난 국산 제품을 제작하는 과정을 보면서 국내 기술력에 많이 놀랐다”고 말했습니다.

방사광은 강력한 빛으로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더 세밀한 곳을 들여다보는 열쇠입니다. 그동안 방사광은 알 수 없는 병으로 아픈 사람들을 위한 약을 개발할 수 있도록 수많은 연구자들을 도왔을 뿐만 아니라, 머리카락만으로도 베토벤의 사망 원인을 파악하기도 했습니다. 그리스 수학자 아르키메데스의 숨겨진 논문을 판독해 역사에 묻힐 뻔한 지식의 기록을 찾아내기도 했고요. 국내 기술로 지어진 4세대 방사광가속기에서 앞으로 어떤 연구 결과들이 나올지 기대가 되는 이유입니다.

dsu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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