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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7일간의 세계여행] 103. 굵어진 빗방울·사라진 이정표…까미노서 길을 잃다
-까미노 데 산티아고 +32:네그레이라에서 올베이로아까지 33.4km


[헤럴드경제=강인숙 여행칼럼니스트] 비는 밤새 유리창을 두드렸다. 요란한 비는 아침이 되어도 그칠 기세가 아니다.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비가 누그러지기를 기다려 보지만 어김도 없다. 가장 먼저 체코 아저씨가 문을 열고 나간다. 빗속으로 멀어지는 아저씨의 뒷모습을 보며 케이와 나도 신발 끈을 조인다. 크로아티아 일행도 하나 둘 나갈 채비를 한다. 전쟁터라도 나가는 듯 결연한 의지로 출발한다.


한 시간쯤 걸으니 비는 소강상태가 되었지만 길은 이미 젖을 대로 젖어 있다. 마지막으로 치닫는 발걸음을 즐기게 된다. 빠르게 걷는 케이는 성큼성큼 멀어지고 혼자만의 까미노를 만끽하며 작은 마을을 둘러 나간다. 지금까지 노란 화살표를 따라 잘 걸어왔는데 갑자기 화살표가 보이지 않는다.

길은 두 갈래, 마을 골목을 향하는 길과 문을 나서서 들판으로 가는 길이다. 비 내리는 거리에는 길을 물을 사람도 없다. 고민하다가 마을 밖 경치 좋은 곳으로 나간다. 이런 길이 까미노다 싶게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지는 길이다. 기분 좋게 15분 정도 걸었는데 아무래도 이상하다. 더 이상 화살표도 표지석도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이곳은 까미노가 아니라 그냥 농지인 듯하다. 오던 길을 되짚어 처음 화살표를 잃었던 두 갈래 길로 돌아간다. 이번에는 아까 가지 않았던 반대편 길, 골목 모퉁이를 돌아보니 그곳에 노란 화살표가 그려져 있다. 하마터면 인적도 없는 다른 길로 걷다가 헤맬 뻔했다.


제대로 길을 찾는데 30분 이상을 소모했다. 까미노를 걸으면서 길을 잃어버리긴 처음이다. 나보다 늦게 출발했을 크로아티아 친구들이 하나 둘 인사를 하며 지나간다. 이젠 까미노의 달인이 된 줄 알았는데 허허롭다. 익숙해졌다고 방심한 순간 찾아오는 실수가 어디 까미노에서만 일어나는 일인가 싶다. 마침내 길을 찾았다는 안도감보다 길을 잃은 스스로에게 짜증이 앞선다. 사는 게 다 그런 거라는 생각을 하며 씁쓸한 발걸음을 옮기는데 갑자기 빗방울이 굵어진다. 벗어 들고 가던 우비를 다시 입어보지만 추위에 굳어진 몸이 잘 움직여지지 않는다. 그러는 사이 떨어지는 빗방울은 더 무거워진다.


잠깐 그렇게 멍하니 서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진다. 괜찮은 거냐고 물어보면서 내 우비를 잡아 바로 입혀주는 손길은 크로아티아 팀과 함께 걷고 있는 스페인 여자다. 빗방울이 막 떨어지는데 우비를 입으려고 허우적거리는 내 모습을 뒤에서 본 것이다. 마음은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대답이 먼저 튀어나온다. 빗줄기마저 즐기는 듯 유쾌한 그들의 가벼운 발걸음을 뒤에서 바라보며 걷는다.


다음 마을의 모퉁이에서는 케이가 발을 구르며 기다리고 있다. 멈춰 서서 기다리기에는 비가 너무 내려서 춥다면서도 늦는 내 발걸음을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까미노에서 산전수전을 함께하다 보니 거의 친동생 수준이 됐다. 굵어진 빗줄기를 피해 함께 마을의 바로 들어간다. 앞뒤로 걷던 크로아티아 팀과 스페인 여자들도 먼저 들어와서 왁자지껄 하게 쉬고 있다. 비교적 거리가 짧은 포르투갈길을 걸어와서인지 생기가 넘치는 그들이 보기 좋다. 단순하게도, 따뜻한 까페콘레체 한 모금에 기분이 풀린다. 비는 여간해서는 그치지 않을 모양이어서 차라리 비를 맞고 걸어서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는 것이 낫다. 따뜻하고 편하다고 마냥 바에 앉아 있을 수는 없어서 하나 둘 까미노로 다시 나선다.


“비가 내리면 비를 맞고 걷는다”는 단순한 문장을 당연히 받아들이기까지, 길은 멀고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눈을 맞으면서 시작한 까미노의 여정이다. 메세타의 갈증 나는 더위도 경험했고 맑은 날들도 많았지만 산티아고 입성하던 그날 눈부신 태양을 보여주던 하늘은 다시 젖고 있다. 우비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귓전에 노크를 해댄다.

​해발 1500m 오세브레이로에서 하산할 때만큼의 돌풍은 아니지만, 비는 제법 내리고 있다. 마음을 추스르고 빗속을 걸으며 지난 시간을 되돌아본다. 내 인생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르다 사라지기를 반복하지만 결국 남는 것은 “나”뿐이다. “당신은 세상에서 당신이 보기를 원하는 변화 그 자체가 되어야만 한다.”는 간디의 말을 떠올린다. 까미노를 걸었다 해서 환골탈태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변화를 원한다면 그것은 나여야만 한다.


온종일 빗속을 걷는다. 온 세상이 물방울로 가득한 날이다. 납골당 비슷한 빌딩묘지에서 순례자는 잠시 발걸음을 멈춘다. 이 비 오는 날 승용차가 한 대가 멈추어 서더니 우산을 펴고 사람들이 내려선다. 이 무덤의 주인 중 누구의 기일인 걸까? 삶이니 죽음이니 생각하며 한 달을 걸어왔어도 막상 현실로 마주하는 죽음이란 단어는 슬프고 허망하다. 삶의 영역 저편에 무엇이 있는 줄도 모르면서 웃고 울고 살아가다가 문득 마주할 저 죽음이라는 현실을 아득한 꿈이라고만 여기고 살았다. 묘지에도 십자가에도 카메라의 렌즈에도 머리 위에도 빗방울이 떨어진다. 걸음을 잠시 멈추고 바라보는 이 장면이 마음에 담긴다.


종일 비는 그치지 않았다. 목적지 올베이로아(Olveiroa)에 도착해서 알베르게를 찾아가니 문만 빼꼼히 열려있다. 아침에 제일 먼저 출발했던 체코 아저씨만 도착해서 라디에이터 옆 침대를 차지하고 누워 있다. 이 분은 산티아고까지는 여자 친구와 함께 걸었는데 다리가 아픈 그녀가 먼저 피스테라에 가서 기다리는 동안 혼자 걷는 중이다. 빨리 출발하고 먼저 도착해서 여유 부리는 이 아저씨가 이제야 부럽다. 축축해질 대로 축축해진 우비를 걸어놓고 젖은 신발을 라디에이터 위에 엎어두고 따뜻한 물로 샤워먼저 한다. 사방이 온통 눅눅하다.


잠자는 도미토리가 있는 알베르게 건물 건너편에 오스피탈레로의 사무실과 주방이 있다. 저녁에 우산을 쓰고 사무실에 온 여자 오스피탈레로에게 알베르게 등록을 한다. 도장을 받으려고 크레덴시알을 주고받다가 그녀의 손과 내 손이 스친다. 이번 주 내내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었다며, 그녀는 차가운 내 손을 잡고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낸다. 비를 피할 잠자리를 주는 것 이외엔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그녀지만, 따뜻한 손길과 진심을 담은 눈길만으로도 충분히 고맙다.


메르까도나 작은 띠엔따도 없는 마을이라 체코아저씨의 우산 하나를 빌려 하나 있는 식당으로 간다. 식당 한 구석의 공간에 구멍가게처럼 간단히 요리할 수 있는 식품들과 와인 몇 가지를 팔고 있다. 아쉬운 대로 파스타와 와인을 사서 돌아온다. 깨끗이 씻었고 잘 곳도 마련되었고 끼니까지 해결한 상태에서 와인잔을 손에 들고 듣는 빗소리는 음악처럼 감미롭다. 와인은 차가웠던 몸을 덥혀주고 마음에도 온기를 지펴준다.

뭉클했던 산티아고 성당의 장엄하던 미사도, 빗속의 걸음도 추억의 서랍에 넣는다. 산티아고를 향하던 뜨거웠던 열망과 까미노를 걸으면서 복잡다단했던 마음이 비로소 정제되는 중이다.


정리=강문규기자mkk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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