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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7일간의 세계여행] 102. 산티아고 지나 100km 더…이 길의 끝은…
-까미노 데 산티아고 +31: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에서 네그레이라까지 21km


[헤럴드경제=강인숙 여행칼럼니스트] 알베르게에는 정적만이 감돈다. 보통의 순례자들이라면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 걸을 채비를 하겠지만, 산티아고에서 걸음을 멈춘 사람들은 이렇게 일찍 일어날 필요가 없다. 순례자 미사에 참석하고 며칠 동안 산티아고에 머물거나 버스로 서쪽 끝 마을 피니스테레(Finisterre)까지 다녀오는 것이 일반적인 일정이기 때문이다. 소란하지 않도록 조심해서 씻고 조용히 알베르게를 나선다.


한 달만에 처음으로 이동 없이 쉬고 나니 컨디션은 매우 좋다. 배탈이 났던 케이도 다행히 몸을 회복했다. 산티아고에 도착해서 콤포스텔라도 받고 대성당에서 향로미사까지 보았지만, 갈 길이 더 남았다고 생각해서인지 끝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지금까지 800km를 걸었다거나 앞으로 100km를 더 걸어야 한다는 수치 역시 머릿속에서 지워진지 오래다. 정신력은 확실히 육체를 압도한다. 미명인 데다가 내리는 비 때문에 더욱 어두운 새벽 거리로 나선다. 다시 까미노다.


어제 그제 몇 번을 다녀온 구시가지로 또다시 걸어간다. 오브라도이로 광장(Plaza de Obradoiro)을 지나야 피니스테레로 가는 까미노가 연결된다. 덕분에 새벽의 산티아고 대성당을 한 번 더 마주한다. 늘 그렇게 걸었지만, 인적 없는 광장의 비 내리는 아침 풍경이 오롯이 담긴다. 그렇게 열망하던 산티아고에 도착해서 하루를 머물고 기어이 이곳을 떠난다. 옛 순례자들이 “세상의 끝”이라고 인식했다던 까미노의 끝, 더 이상 걸을 수 없다는 그곳으로 걸음을 재촉한다.


산티아고에 도착해보니 모든 것이 산티아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까미노가 변화시켰든 원래 그런 사람이었든 나는, 여전히 나다. 모든 것은 산티아고에 가는 그 여정, 까미노에 있었다. 멀리 보이는 산티아고 대성당의 첨탑은 이제 나에게 커다란 의미가 되었다. 산티아고라는 큰 산 하나를 넘어선다. 산티아고로 향하던 표지가 피니스테레를 의미하는 “F”로 바뀌어 있을 뿐, 노란 화살표는 여전하다.


피니스테레(Finisterre)를 향해 가는데 자꾸 피스테라(Fisterra)라는 이정표가 등장한다. 피니스테레는 공식 스페인어 지명이고 피스테라는 갈리시아어다. 원주민이 원하는 대로, 이제부터 “피스테라”라고 부르기로 한다. 길의 이름도 까미노데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가 아니라 까미노델피스테라(Camino del Fistera)로 바뀌어 있다. 표지석이 다시 등장하고 피스테라까지의 거리가 다시 표기되기 시작한다. 여전한 화살표와 여전한 조개껍데기 표식과는 달리 남은 거리는 85.836km, 소수점아래 셋째 자리까지 정확하게 표기되어 있다. 의미로는 산티아고가 목적지이지만 수치상 최종 목적지는 피스테라다. 그래서 산티아고에 들어오면서 카운터가 사라진 것이었다. 저 카운터가 “0”이 되면 걸음을 멈추게 될 것이다.


우비를 꺼내 입을 만큼의 비가 내리다 멈추다를 반복한다. 이제는 날씨 따위, 길의 상태 따위, 걸어야 할 거리 따위는 초월한다. 오늘 하루를 걷고 나면 걸을 날짜가 단지 이틀밖에 남지 않았음이 아쉬워지는 시점이다. 한 달 동안의 순례길은 한 게으름뱅이를 걷기 예찬자로 만들어 놓았다. 그렇다고 다리가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날마다 걸으니 발목은 늘 그만큼은 부어오른다. 물집이 휩쓸고 간 발가락들은 죽은 세포가 떨어져 나가고 새살이 돋느라 너덜너덜하다. 다만 그것들이 커다란 영향을 미치지 않고 걷기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을 뿐이다. 설탕을 넣지 않은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커피 취향도 까미노에서는 바뀐다. 투박한 잔에 설탕을 듬뿍 넣어 마시는 따뜻한 까페콘레체는 언제나 좋았다. 특히 비 오는 쌀쌀한 날이면 더욱 진한 향기와 찻잔에서 손끝으로 전해지는 따뜻함, 혀에 달라붙는 달콤함이란 순례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맛이다.


흐르는 강물, 아치형의 다리, 마을로 들어가는 돌길…. 기시감이 드는 풍경들이다. 처음 걸으면서도 길은 생소하지 않다. 강물소리, 비 오는 날의 마을과 숲은 마치 까미노 초반에 보던 풍경 같기도 하다. 스페인 북부 지방인 바스크, 까딸루냐, 갈리시아는 모두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까미노가 알려준 사실들이다. 스페인 시골의 풍경을 어쩌면 대도시에 거주하는 스페인 사람보다 더 잘 알게 되었다. 까미노에서의 일상에 익숙해졌을 뿐이다.


네그레이라(Negreira)에 도착한다. 제법 큰 마을인 데다가 공립알베르게가 마을 출구 쪽에 있어서 마을을 관통해야 한다. 고즈넉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거리를 지나 알베르게로 향한다. 조망도 좋고 쾌적해 보이는 알베르게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다. 건물에 전등이 켜있고 그 안에 있는 자동판매기도 켜진 것을 보면 분명히 지금 운영 중인 알베르게가 맞는데 안에 사람이 없는지 문이 잠긴 것이다. 오다가 마을 중심가에서 사설알베르게를 몇 군데 보기는 했지만 되돌아가야 하는 건지 난감하다.
21km의 짧은 이동이라 빨리 도착해서 시간은 많다. 배낭을 지고 둘 다 움직이기 보다는 나는 짐을 지키며 오스피탈레로를 기다리고 케이는 시내로 가서 알베르게 상황을 알아보기로 한다. 어제까지 배탈에 고생하던 케이가 회복이 되어서 다행이고 고맙다.


기다려도 오스피탈레로는 오지 않는다. 시내로 간 케이도 금방 돌아오지는 않는다. 자동차만 몇 대 지나갔을 뿐 행인조차도 만날 수 없다.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답답해져서 알베르게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한다. 옆으로 돌아가다 보니 주방과 연결된 작은 문이 보이길래 무심코 손잡이를 잡는데, 문이 살며시 열리는 것이 아닌가? 일부러 열어놓은 것인지는 실수로 잠그지 않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알베르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신대륙 발견이라도 한 듯 흥분해 있는데 마침 케이가 돌아온다. 그가 찾아간 사립알베르게는 문을 열지 않았다고 한다. 오스피탈레로가 꼭 올 것이라고 믿은 그는 오늘 저녁과 내일 아침거리까지 장을 봐가지고 돌아왔다. 급한 김에 알베르게 안으로 들어간다. 여기는 일회용 침대 시트와 베개커버를 쓰는 곳이어서 침대를 차지하고 시트 가져다 씌운다. 잠 잘 곳이 마련된 안도감으로 짐을 풀고 샤워를 하고는 파스타로 저녁을 때우고 맥주도 한 잔 하는 여유까지 부리며 오스피탈레로를 기다린다. 이렇게 오스피탈레로가 늦는 경우도 있었기에 별 의심 없이 기다리는 것이다.


해가 저물자 기다리던 오스피탈레로는 오지 않고 나이 든 아저씨 한 분과 여섯 명의 젊은이들이 차례로 들어온다. 여기 들어온 경황을 설명하고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니 그들은 하나같이 잘된 거라고 환호성을 지른다. 어쨌든 날이 저물어 순례자들은 오늘 밤 여기서 머무를 수밖에 없다.
같은 방을 쓰게 된 인상 좋은 아저씨는 체코 사람이고 다른 방으로 간 일행들은 크로아티아 사람 넷과 스페인 여자 둘이다. 명상을 하듯 조용한 아저씨와 시끌벅적한 젊은 크로아티아 팀이 비교가 된다. 케이와 나는 “프랑스 길”을 걸어왔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포르투갈에서 출발하는 “포르투갈 길”을 걸어온 사람들이다. 케이는 나중에 포르투갈 길을 더 걸을 예정이라 이들에게 조언을 얻는다. 아무래도 까미노에서 가장 유명한 프랑스 길은 정보가 많지만 포르투갈 길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끝내 오스피탈레로는 오지 않았다. 까미노를 걷다 보면 별의 별 일이 다 있지만 오늘 같은 날은 처음이다. 순례자들 아홉 명만 쾌적한 알베르게에 누워 하루를 마감한다.
산티아고를 지나온 오늘에서야 이 걸음이 정리되기 시작한다. 그 걸음, 그 풍경, 그 하늘, 그 향기, 그 소리, 그 날씨, 그 사람들, 그리고 그때의 마음들이 이렇게 생생한데, 이제야 이 걸음이 이틀 후면 끝난다는 것이 실감 나는 것이다. 아직도 남은 걸음이 있다는 사실이 순례자를 행복하게 한다. 인생의 한 달을 “순례자”로 살았던 시절이 있었노라고 기억하게 될 아름다운 날들이 마지막을 향한다.

정리=강문규기자mkk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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