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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대 뮤지컬’주연은 따로 있었다
캣츠·오페라의 유령·레 미제라블·미스 사이공…
세계 4대 흥행 뮤지컬 무대제작부터 유통까지
오페라의 유령 1억3000만 관람 최장공연 기록
음반 등 부가상품도 불티 2차수익도 천문학적



미국 경제 전문지 포브스가 최근 ‘2016년 빌리어네어(억만장자) 리스트’를 발표했다. 올해도 1위인 빌 게이츠를 비롯해 워런 버핏, 마크 저커버그, 왕젠린 등 익숙한 이름들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뮤지컬 팬이라면 놓칠 수 없는 이름이 한 사람 등장했다. 바로 영국의 뮤지컬 제작자 카메론 매킨토시(Cameron Mackintoshㆍ69). 그는 뮤지컬 제작자로서는 역대 처음으로 억만장자 순위에 이름을 올렸다. 그의 자산은 11억 달러, 우리돈 1조 3000억원 웃도는 수준이다. 


보통의 뮤지컬 팬이라면 매킨토시의 이름이 낯설 수도 있다. 뮤지컬하면 주옥같은 넘버들로 부와 명예를 쥔 작곡가 앤드류 로이드 웨버(Andrew Lloyd Webberㆍ67)를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오히려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웨버는 그야말로 음악감독이자 작곡가다. 웨버가 만들어내는 무대를 제작하고 유통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매킨토시다. 공연제작자가 뭔 돈을 이리 벌었나 하겠지만 그가 손댄 작품을 살피면 납득이 간다.

매킨토시는 세계 뮤지컬 계의 4대 흥행작으로 꼽히는 ‘캣츠’, ‘레 미제라블’, ‘오페라의 유령’, ‘미스 사이공’을 모두 제작했다.

매킨토시는 영국 엔필드에서 트럼펫 연주가인 부친 밑에서 태어났다. 8살 때 친척을 따라 줄리언 슬레이드의 ‘살라드 데이즈(Salad Days)’ 공연을 보게 됐다. 실제 연주가가 진짜 피아노를 연주하는 동안 인형들이 무대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시늉을 하는 매직 피아노가 어린 매킨토시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때의 경험은 어린 꼬마로 하여금 “나도 이런 재밌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뮤지컬 제작자가 장래희망이 되게 만든다.

매킨토시는 17살 무렵 센트럴 스쿨 오브 스피치 앤 드라마의 무대경영 코스로 진학한다. 하지만 그는 학교를 오래다니지 않았다. 고리타분한 그리스의 극작가와 연극 이론만 반복해서 공부하는 것이 지겨웠기 때문이다. 과감히 학교를 뛰쳐나온 그는 웨스트 엔드(West endㆍ영국 런던의 연극 중심지로 미국 브로드웨이와 뮤지컬의 양대 지역으로 불린다)에서 극장 심부름을 시작했다. 학교가 아닌 극장 무대 뒤에서 청소와 잔 심부름을 하며 살아있는 극장의 생리와 뮤지컬 업계의 여러가지 상황을 체득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꿈꿨던 대로 ‘재밌는’ 뮤지컬들을 제작하게 된다. 물론 뮤지컬 제작이 바로 성공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1968년 처음으로 제작한 ‘애니씽 고스’는 2주 만에 막을 내렸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계속 작품 제작에 도전하면서 ‘마이 페어 레이디’, ‘올리버’ 등의 작품을 통해 괜찮은 젊은 제작자의 이름을 조금씩 떨치게 된다.

그의 인생이 변하게 된 것은 1981년부터.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던 한 음악감독을 만나면서 부터다. 바로 앤드류 로이드 웨버다. 당시 웨버와 그의 연출자 해롤드 프린스의 의견이 엇갈리며 뜻하지 않게 매킨토시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두 사람이 손잡아 만든 ‘캣츠’는 매킨토시의 뮤지컬 제작 인생을 일거에 변화시킨다. 캣츠는 1981년 웨스트 앤드에서 초연된 이래로 1989년부터 웨스트앤드 최장기 기록을 세우며 21년간 8950회나 공연을 하게 된다. 전 세계 뮤지컬계의 최고 흥행작으로 올라서게 된 것. 영국을 넘어 미국은 물론 아시아까지 캣츠의 명성이 알려진다.

매킨토시와 웨버의 인연은 1986년 ‘오페라의 유령’으로 이어진다. 오페라의 유령은 2006년 캣츠가 지켜온 7486회의 공연 기록을 깨며 브로드웨이 최장기 공연 타이틀을 물려 받았고, 2011년엔 25주년 기념 공연을 갖기도 했다. 오페라의 유령은 전 세계 27개국 145개 도시에서 15가지 언어로 공연됐고, 무려 1억3000만명의 관객이 찾은 작품이 됐다. 영화와 연극, 발레, 오페라 등 티켓을 판매하는 모든 종류의 작품을 다 합쳐도 도달하지 못하는 56억 달러(약 6조 7천억 원) 이상의 수익을 거둬들여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뮤지컬로 평가 받는다.

그렇다고 매킨토시의 성공이 앤드류 로이드 웨버라는 걸출한 작곡가의 그늘에서만 이뤄진 것은 아니다. 웨버 없이도 그는 많은 작품을 히트시킨다. 대표적인 것이 우리에게도 친숙한 레 미제라블(Les Misrables). 사실 레 미제라블은 프랑스에서 1980년에 먼저 뮤지컬로 만들어 졌었다. 작사가 알랭 부브릴과 작곡가 미셸 쇤베르크가 프랑스에서 세 달 간 100회의 공연을 마치고 막을 내렸다. 이 소식을 접한 매킨토시가 로열 셰익스피어 극단과 함께 레 미제라블을 새롭게 제작하면서 대중적 성공을 이뤄 냈다. 레 미제라블은 지금까지 22개의 언어로 44개국 347도시에서 공연됐으며 7000만 명의 관객이 찾았다. 판권도 40개국이 넘는 곳에 팔았다. 레 미제라블은 1985년 웨스트앤드에서 초연한 이래 줄곧 오픈 런(공연이 끝나는 날짜를 지정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공연하는 것)으로 공연 돼 오고 있다. 계속해서 흥행하는 뮤지컬 만이 오픈 런 공연을 할 수 있다.

레 미제라블은 공연 음반이나 관련 머천다이즈 등의 부가 상품도 덩달아 팔리며 2차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 2012년엔 뮤지컬 영화로 다시 만들어 져, 우리나라에선 뮤지컬 영화 사상 국내 최고 흥행 성적을 올리며 600만명 가까이 들었다. 매킨토시가 “레 미제라블을 통해 영화보다 뮤지컬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다는 걸 증명했다”라고 인터뷰할 만 하다.

1989년에는 미스 사이공 마저 흥행시키며 매킨토시는 뮤지컬 제작 계의 ‘미다스 손’이라 는 별명을 증명해 냈다. 1992년에는 뮤지컬 계에서 최고의 상이라 불리는 리차드 로저스 어워드(Richard Rodgers Award for excellence in Musical Theater)를 수상하기도 했다. 리차드 로저스 어워드는 뮤지컬 연출의 거장 헤롤드 프린스와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마리아 역으로 유명한 여우 줄리 앤드류스 같은 선택된 사람들만 수상한 상이다. 1996년엔 매킨토시의 영혼의 짝 앤드류 로이드 웨버도 이 상을 수상한다.

35년이 넘게 흥행가도를 달리면서 매킨토시는 엄청난 거부가 됐다. 그는 레 미제라블 외에도 미스 사이공의 100% 지분을 가지고 있고, 캣츠와 오페라의 유령에도 여전히 일부 지분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현재에도 그는 세계 어디선가 그의 작품이 공연되고 변주될때마다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 일본과 한국, 중국 등 동아시아의 뮤지컬 시장이 커지면서 오히려 그의 수익은 더 늘어나는 추세다.

그의 재산은 그뿐이 아니다. 땅 값 비싸기로는 세계 최고 수준인 런던의 웨스트 엔드에 무려 8개의 뮤지컬 극장을 소유하고 있다. 브로드웨이의 공연 라이센스 에이전시인 MTI(Music Theater International)의 지분도 75% 가지고 있다. 뮤지컬이 사랑을 받는 한 매킨토시의 이름은 억만장자 리스트에 계속 등장할 전망이다. 


천예선 기자ㆍ한지연 인턴기자/vividha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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