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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7일간의 세계여행] 84. 발은 아파도 눈은 호강…‘이별과 만남’의 순례길
까미노 데 산티아고 +13:온타나스에서 보아디야델까미노까지 28.6km



[헤럴드경제=강인숙 여행칼럼니스트] “부엔 까미노(Buen Camino)!”

통성명까지는 안 했어도 같은 도미토리를 쓴 인연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출발하는 사람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정다운 인사를 나눈다. 오늘은 더욱 절실하게 “부엔까미노!”를 외치며 시작한다. 제발 발이 아프지 않아야 할 텐데. 그런 바람과는 달리 시작부터 울퉁불퉁한 자갈이 툭툭 튀어나오는 길이다. 행여 발에 무리가 갈까 봐 조심조심 걷는다. 눈에 거슬릴 것 없는 풍경은 시야를 시원하게 확보해 주고 가슴속으로 전달되는 아침 공기는 신선하기만 하다.


남미에서 사온 등산용 바지는 통이 커서 예쁘지는 않아도 무릎에 지퍼가 달려있어 분리하면 반바지가 된다. 주로 바짓가랑이 쪽이 더러워져서 무릎 아래 부분만 빨면 계속 입을 수 있어 편하다. 갈아입을 옷도 두 벌이면 족한 것을 요일별로 입겠다고 가져와서는 배낭에 지고 다닌다. 배낭 안에는 쓸모없는 것들도 많다. 마음 같아선 버릴까 싶기도 하다가 멀쩡한 옷들이고 까미노를 마친 후 여행할 때도 입어야 한다고 버리지도 못한다. 그렇게 이 길을 걸으면서 배낭은 필요 없는 짐으로 더 무겁고 트레킹화라는 이름의 허접한 신발은 날마다 헐어만 간다.

길인지 밀밭인지 헷갈리는 오솔길은 사람들이 걸어간 만큼만 길이 보이고 나머지는 풀이 우거져있다. 사람들이 많이 걸어야 길도 더 많이 드러날 것이다. 걷는 사람이 드문 지금은 당연하게도 걷기 편하진 않다. 아픈 발에는 벌써 무리가 가고 있다.


길은 험난해도 경치는 좋다. 눈은 온갖 호강을 다하고 발은 고생만 한다. 불쌍한 내 두 다리…. 다행히 다음 마을까지는 아스팔트다. 좋은 경치에 자동차도 없는 거리, 걷기 편한 길이 반갑다. 산안톤(San Anton)의 수도원과 순례자 숙소가 있던 자리는 15세기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아치의 흔적이 남아 길을 지나가는 순례자들에게 중세의 느낌을 전한다. 중세의 순례자들을 떠올리며 걸어보지만 목숨을 담보로 했을 그 척박한 시대의 순례와 지금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길 사이엔 밀밭이 펼쳐지고 지평선을 바라보고 걸어야 하는 메세타는 오늘도 계속된다. 어제처럼 한낮의 뜨거움 속이 아닌 이른 아침이라 경치를 즐기며 걷는 게 가능하다. 복사열이 최고조일 때의 메세타는 어떤 계절이라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어제 깨달았다.


다음 마을 카스트로헤리스(Castrojeriz)는 카톨릭과 이슬람 문화의 흔적이 남아있는 마을이다. 마을 초입의 성당이 메세타의 초원 위에서 순례자를 반긴다. 너른 들판만 보다가 마을만 만나도 좋으니 성당은 더욱 반갑다. 언덕 위의 유명하다는 고성을 바라보며 마을을 향해 오른다. 중세 까미노의 중심마을이었다는 곳이라 성당, 알베르게도 많고 까미노를 위한 물건들도 많이 구비된 곳이다. 마을로 들어가니 여러 가지 순례용품을 파는 가게들이 있다. 까미노에 들어오기 전에는 잘 맞던 등산용 바지가 살이 빠져서 헐렁거려서 벨트를 하나 사서 두른다.


까미노에서 자주 만나던 독일인 두 사람과 가게 앞에서 또 우연한 재회를 한다. 이곳의 알베르게 앞에서는 푸엔테라레이나에서 파스타를 요리해 주었던 다니엘레도 다시 만난다. 이렇게 만나기도 하고, 길이 엇갈려서 만나지 못하기도 하는 게 순례길이다. 괜히 반가워서 그간의 소식과 앞으로의 여정을 묻게 된다.


시간 날 때마다 엽서를 써서 가지고 다녔는데 마침 우체국이 눈에 띄어서, 배낭 바깥쪽에 넣고 다니던 엽서를 꺼내들고 들어간다. 산티아고에서 날아간 엽서는 수취인들에게 어떻게 읽힐까 궁금해진다. 이 마을에는 순례자 용품을 파는 가게들이 있어서 좋다. 걷느라 헐렁해진 허리춤에 끼워넣을 벨트도 하나 장만한다. 아침도 거른 채 걷기 시작했기에 식당에서 데사유노를 먹고 메르까도에서 간식거리를 사서 배낭에 쟁여놓고 출발한다. 벌써 10km나 걸어왔는데 이제야 오늘의 까미노가 시작되는 기분이다.


까냐다(cañada)는 스페인어로 가축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소가 그려진 표지판만 보고도 가축을 조심하라는 말인 줄 알고 웃음이 나온다. 그만큼 길을 건너는 가축들이 많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걷다 보면 강을 건너게도 된다. 오늘은 해발 1000m의 모스텔라레스 언덕(Alto de Mostelares)을 넘어야 한다. 마을을 빠져나오고 나서부터는 언덕을 향해 서서히 고도를 높이는 길이다. 천천히 오르는데도 무척 힘이 든다.

완만한 경사지만 높이가 있으니 한참 동안 올라서 드디어 모스텔라레스 언덕의 기념비에 다다른다. 어렵게 오른 만큼 이곳에서 조망하는 경치는 예사롭지 않다. 정상에는 태양빛을 받으며 명상을 하고 있는 순례자가 한 사람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제 에스피노사델까미노의 소박한 알베르게에서 같이 묵은 로렌조다. 과연 영성을 추구한다던 그답게 이 봉우리에서 명상 중이다. 명상 삼매경인 로렌조와 짤막한 인사를 나누고 나서 힘들게 올라온 케이와 나도 여기서 잠시 숨을 돌린다. 


멀리 봉긋하게 솟은 산 아래로 카스트로헤리스(Castrojeriz)마을과 직전까지 걸어온 길이 보이고, 지평선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장관이 연출된다. 걷기는 힘든 메세타 평원이지만 지금 바라보는 내 눈엔 그토록 감탄스러웠던 한 달 전의 파타고니아보다 못할 게 없는 멋진 풍경으로 비친다.

바로 눈앞으로는 오늘 갈 길이 지도처럼 펼쳐진다. 남은 길을 열심히 걸어야 하는 오후라는 것을 여지없이 깨닫게 된다. 언제쯤 일어날지 모르는 명상에 빠진 로렌조를 두고 우리는 다음 마을을 향한 여정을 시작한다. 길 양편은 모두 끝없는 밀밭이다. 대체 밀을 얼마나 심고 수확하는 걸까? 까미노의 메르까도에서 농산물이 왜 그리 싼지 알 것 같다. 


강을 따라 걷는 길이 끝 모를 평원을 걷는 것보다는 낫다. 그러나 문제는 참을 수 없을 만큼 발이 아프다는 것이다. 걷다가 주저앉아 양말까지 벗는 일도 잦아진다. 물집이 터져서 양말이 자꾸 젖기 때문이다. 다리도 아프고 힘도 들지만, 온통 신경이 발에만 집중되어 그 이외의 작은 고통은 느껴지지도 않는다. 아픈 발과는 별개로 눈은 아름다운 풍경을 쳐다보며 만족하고 있고 뇌는 이런 복합적인 정보들에 각자 반응을 하고 있는 현실이 우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마을에 들어서면 한참을 앞서 걷던 케이가 자리를 잡고 쉬고 있다. 그렇게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다는 기대는 고통이 덜어준다. 그러고 보면 혼자 걷는다는 말이 무색하게 의지가 되는 것은 역시 사람이다. 그러나 오늘의 발걸음은 기다려주는 케이의 마음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아프기만 하다.


발이 부르트도록 걷는다는 관용어의 의미를 몸소 체험한다. 다른 날보다 발에 눈길이 간다. 주인을 잘못 만나 스페인까지 와서 고생만 하는 불쌍한 발이다. 발가락에 물집이 잡히고 발등이 부어오르지만, 그래도 걸어야 한다. 정말로 발이 부러지는 불상사만 아니라면 걸을 수는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런 아픔을 견뎌내고 있는 나를 대견해하면서, 치명적이지 않은 고통이 나를 조금 더 고통스럽게 하는 것을 즐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길을 걸으면 물집이 터지면서 발은 아프고 얇은 신발 밑창으로 자갈이 그냥 느껴져서 발이 더욱 부르트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기분 좋게 걷기 시작했지만 마지막 보아디야에 들어오면서는 거의 이를 악물게 된다.

보아디야델까미노(Boadilla del Camino)에 도착하자마자 어제 같은 알베르게에서 묵은 한국사람과 재회한다. 아침에 늦게 출발하려 알베르게에 남았던 그녀는 이곳의 사립알베르게를 홍보하려고 온타나스에 갔던 사람을 만나 그의 차를 얻어 타고 바로 이곳으로 왔다고 한다. 땀에 찌든 우리에게 귤을 건네주면서 그녀가 묵게 된 알베르게를 소개해 준다. 저렇게들 차를 타고 다녀도 되나 싶기도 하지만 그건 그녀의 까미노일 뿐이다. 지친 우리는 우선 짐을 내려놓을 알베르게부터 찾는다.


겨울의 비수기가 끝나고 오늘 개장했다는 이곳의 알베르게는 시설이 독특하고 주인도 엄청나게 친절하다. 아까 그 한국인을 만난 게 다행이었다. 짐을 풀고 우선 씻기라도 해야 아픈 발이라도 편해질 것 같아 샤워실 먼저 찾는다. 샤워 중에 발바닥에 뭐가 잡혀서 보지도 않고 떼어냈는데 그것은 부르고스 갈 때 잡힌 커다란 물집 위에 붙인 반창고였다. 물집을 덮고 있던 피부가 반창고를 따라 쭉 찢어지는 게 느껴진다. 이미 하얗게 괴사한 각질이라 아픈 것은 아니지만 물집이 워낙 커서 꽤 길게 찢어져 덜렁거린다. 평소 살짝 베인 손가락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는 새가슴이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간신히 샤워를 마친다. 오른발에 붕대를 칭칭 감아놓고는 발꿈치에 힘을 주어 걸으면서 남은 빨래를 해서 널찍한 마당에 널어놓는다. 이제 나의 발바닥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산행, 도보, 산책 등 걷는 일과는 담쌓고 지내온 나는 이 방면엔 진짜로 일자무식이다. 아픈 부위를 보는 것도 싫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나에게는 최악의 상황이다.

진저리를 치면서 빨래를 널다 보니 나보다 먼저 샤워를 마친 케이가 마당의 테이블에 앉아 누군가와 코코아를 마시고 있다. 다가가 보니, 케이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은 지나가던 한국인 자전거 순례자다. 자전거는 아무래도 걷는 것보다는 빠르니까 지나가다가 바를 겸하고 있는 이 알베르게로 잠깐 쉬려고 들어왔다고 한다. 테이블에 앉아 케이에게 내 발 상태를 하소연하는데, 듣고 있던 그 사람이 내 발을 한 번 보자고 한다. 붕대를 풀어 발을 보이니 벌떡 일어나 그의 자전거에서 구급약 상자를 꺼내온다. 내 발을 아무렇지도 않게 붙잡고는 능숙하게 소독약을 바르더니 찢어진 피부를 잘라 연고를 바른 후 거즈를 붙여준다. 물집이 심한 발가락에는 소독약으로 적신 바늘에 실을 꿰어 통과시켜 진물이 빠져나가게 두는 거라고 처치 방법도 알려준다. 여분의 거즈와 소독약을 챙겨주고는 모자라면 약국에서 사면된다는 당부도 잊지 않는다. 이 정도 상처는 별것 아니라고 위로를 더하는 것은 당연하다.


나에게는 영화처럼 극적인 장면에 출현한 이 분은 까미노를 무려 일곱 번째 걷고 있다는 한국인 사업가다. 그는 일 년에 한 달은 무조건 이곳에 온다고 한다. 까미노에서 만난 아픈 사람을 적극적으로 돌보게 된 것은 그가 처음 까미노에 왔을 때 만났던 어떤 순례자 때문이라고 한다. 첫 까미노에서 물집이 생기고 무릎이 아파 고생하며 걷는 중에 어느 알베르게에서 만난 프랑스 할아버지가 그를 극진히 치료해 주었다고 한다. 그때 깊은 감명을 받은 그는, 이제는 필요하지 않아도 구급약통을 늘 휴대한다는 것이다. 오늘은 내가 그 위로를 받은 장본인이 되었다.

무슨 이런 우연의 일치가 있을까? 퉁퉁 부어오른 발로 고통스럽게 걸었고 급기야 물집까지 찢어져 기분이 최악이던 그 순간, 극적인 장면에 나타나 준 그분은 나에게는 천사처럼 느껴진다. 아픈 곳을 치료하고 지친 마음을 달래 주는 순례자를, 그것도 좀체 만날 수 없던 한국 사람을 만나다니…. 까미노를 완주하고 나면 나도 그런 따뜻한 마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일까?

저녁식사는 이 알베르게의 식당에 오늘 이곳에 머무는 순례자들이 모두 모여서 먹는다. 특히 오늘은 한국인이 다섯 명이나 모였다. 내 발을 치료해 주신 한국 분도 출발하지 않고 여기서 묵기로 해서 오랜만에 한국인끼리의 수다도 곁들여 저녁을 먹는다. 콩 수프, 돼지고기 와 버섯, 하우스 와인이 전부인 소박한 식사를 모두들 감사히 맛있게 먹는다. 한국인들 뿐 아니라 다른 순례자들도 무척 유쾌한 사람들이라 왁자지껄하게 저녁을 먹는다.

여기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시각만 다르게 지나왔을 뿐, 오늘 걸어온 모든 길을 공유한다. 사람의 한계란 다들 비슷한 법이어서, 내 발이 아픈 만큼 다른 순례자들도 고통을 느끼기도 할 것이다. 발이든, 다리든 마음이든 어디든 말이다. 피로한 하루의 끝, 와인잔을 부딪히는 순례자들의 환한 얼굴들이 서로에게 따뜻한 위로가 되고 있다.

정리=강문규기자mkka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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