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YS 서거] 김 전 대통령, ‘북핵갈등’으로 긴장과 우애의 한-미 관계
[헤럴드경제] 22일 새벽 타계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재임기간 한국과 미국의 관계 유지에 있어 가장 중점적으로 논의된 것은 바로 북한의 핵문제였다. 특히 한 달 차이로 집권한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는 개인적 우의를 나누면서도 약간의 긴장과 갈등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1993년 초 김 전 대통령과 클린턴 전 대통령은 비슷한 시기에 정권을 출범했으나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영변의 미신고 시설 2곳의 특별사찰을 요구하자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하면서 이른바 ‘1차 북핵위기’를 맞고, 북핵문제가 한미관계를 흔드는 복병으로 떠올랐다.

초반 김 전 대통령은 북핵문제의 해결에 미국의 대리협상을 기대했으나 협상이 미국의 주도로 끌려가고, 특히 한국을 소외시키고 북한이 미국과 독자적으로 관계 개선을 시도하는 ‘통미봉남’정책으로 미-북 간 뉴욕 고위급 회담에서 북한의 NPT 탈퇴 효력 정지 합의를 이끌어내자 이에 대해 깊은 우려를 전달하기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클린턴 전 대통령과 그 부인이자 현재 민주당의 유력한 대선주자인 힐러리 클린턴은 1993년 7월 국빈 방한했고, 클린턴 전 대통령은 이를 계기로 김 전 대통령의 반발을 무마하고자 애를 썼다는 후문이다.

방한기간 김 전 대통령은 클린턴 전 대통령과 함께 조깅을 한 뒤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는 친필 휘호를 직접 써주기도 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2004년 펴낸 자서전 ‘나의 인생’(My Life)에서 1993년 7월 방한했을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힐러리와 나는 김영삼 대통령의 손님으로서 영빈관에 묵었다”며 “그곳에는 실내 수영장이 있었고 몸을 담그려고 하자 갑자기 음악이 흘러나왔다”고 회고했다.

그는 “엘비스 프레슬리에서부터 재즈에 이르기까지 내가 좋아하는 음악에 맞춰 수영을 했다”며 “이것은 한국 고유의 접대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썼다. 그는 특히 “김 대통령과의 정상회담과 의회 연설이 끝난 뒤 나는 한ㆍ미 간의 오랜 동맹에 대한 감사와 그것을 유지해야 하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한국을 떠났다”고 밝혔다.

그러나 1994년 초부터 한반도 전쟁위기가 고조됐고 미국은 IAEA 사찰단이 영변 재처리시설에 대한 사찰에 실패하자 북한과의 외교적 협상이 더이상 불필요하다고 보고 유엔 안보리 제재 결의를 추진하는등 강경한 태도로 돌변했다. 당시 윌리엄 페리 국방장관은 북한 영변 핵시설에 대한폭격 계획까지 검토했다.

그해 6월 미국이 주한 민간인 소개령을 검토하기 시작하자 김 전 대통령은 이를 전쟁이 임박한 징후로 이해하고 제임스 레이니 주한 미국대사를 불러 “미국이 우리 땅을 빌려 전쟁을 할 수는 없다”며 “한국군의 통수권자로서 군인 60만 중에 절대 한사람도 동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력한 항의의 뜻을 표했다. 한반도 위기는 이내 평양을 깜짝 방문했던 지키 카터 전 미국 대통령에 의해 진정됐다.

1994년 10월 타결된 제네바합의를 놓고 김 전 대통령은 강력한 불만을 표출해 당시 중간선거를 앞두고 ‘업적’을 만들려고 했던 클린턴 전 대통령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김 전 대통령은 당시 제네바 합의를 ‘설익은 타협’이라고 지칭하면서 “우리는 북한과 400차례 넘게 대화했지만, 아무것도 이행된 게 없었다”며 미국의 협상 태도를 문제 삼기도 했다.

onlinenews@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