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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계의 왕실-<16> 캄보디아]실권없는‘그림자 국왕’…식사·종교행사도‘나홀로’…
모니봉 왕조부터 100여년 절대권력 도전
시하누크 前국왕 한때 해외도피 수모도
1953년 독립 이뤘지만 ‘힘없는’ 왕실로
시하누크, 2004년 아들 시하모니에 양위
정치보다 무용·영화 관심 ‘조용한 국왕’



근ㆍ현대 캄보디아 왕실의 역사는 권력을 향한 도전과 좌절의 연속이었다. 열강과 이념, 주변국 사이에서 절대권력을 향한 끊임없는 줄타기를 시도했지만, 결국 남은 것은 이름 뿐인 왕관이었다.

캄보디아 왕실가족. [노로돔 시하모니 공식 홈페이지]

독립을 이끈 왕실=20세기 캄보디아 왕조의 백미는 시소와트 모니봉(재위 1927~1941년)이다. 그는 선왕들과 달리 프랑스 보호령 아래에서 꼭두각시 왕 노릇을 벗어나는 데 일생을 바쳤다. 프랑스를 몰아내기 위해 1930년대 지식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던 인도차이나공산당과도 손잡고, 한때 프랑스를 몰아낸 일본을 지지하기도 했다. 제대로 된 국가에서 ‘진정한 왕’이 되고자하려는 꿈 때문이었다.

하지만 1941년 캄보디아를 점령한 일본에 의해 그는 강제퇴위 당한다. 그의 후임은 18세의 어린 외손자인 노로돔 시하누크(재위 1941~2012)였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프랑스는 캄보디아에 대한 지배권을 다시 확립힌다. 노로돔 시하누크도 외조부처럼 다시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을 열렬히 추구한다. 그는 의회민주주의를 도입을 주도해 1947년에 헌법을 공포하고 1952년엔 내각을 해산해 스스로 총리가 됐다. 캄보디아는 1953년 프랑스로부터 경찰권, 군사권을 회복해 마침내 완전독립을 이룬다.

권력에의 도전=1955년 노로돔 시하누크는 모험을 건다. 총선을 위해 아버지인 수라마릿에게 왕위를 양위하고 정당인 ‘사회주의인민회’를 창당했다. 세습왕관을 버리고 선거를 택한 모험이었다. 이 선거에서 시하누크는 압승을 거둬 총리가 된다. 1960년 아버지이자 국왕인 수라마릿은 건강악화로 1960년 서거했지만 그럼에도 시하누크는 왕위에 오르는 대신 국가원수라는 새로운 직책을 만들어 취임한다. 국민들의 지지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후 그는 좌익과 우익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곡예를 해야만 했다.

1960년대 베트남전은 캄보디아를 쿠데타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시하누크는 ‘호치민루트’를 개방해 북베트남을 돕고 미국의 북베트남 폭격을 비난하며 단교를 선언했다. 시소와트 모니봉 때부터 왕실은 공산당에 심취했고, 그 때문에 프랑스를 몰아낸 베트남의 호치민과 가까웠다.

하지만 북베트남을 지원하던 캄보디아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던 미국은 1970년 우파 친미세력인 론 놀(Lon Nol) 장군을 지원, 쿠데타를 일으킨다. 중국으로 몸을 피한 시하누크는 1975년 미국이 베트남에서 철수하고 론 놀이 하와이로 망명하자 프놈펜에 다시 입성한다.

하지만 크메르루주의 폴 포트는 시하누크 옹립을 통해 정권을 유지하려했을 뿐 그에게 실권을 주지 않는다. ‘킬링필드’로 불리는 폴 포트의 대규모 반대파 숙청 때에도 시하누크는 무기력했다. 크메르루주는 그의 국가수반 직위를 박탈하고 감금하기에 이른다.

38년 만에 찾아온 왕위=1978년 소련의 지원을 받던 베트남과 중국을 등에 엎은 캄보디아가 충돌한다. 하지만 월남전으로 실전 경험이 풍부했던 베트남의 승리였다. 1979년 캄보디아에는 친베트남계 캄푸치아인민공화국이 수립되고 폴 포트 등 크메르루주는 북부지역으로 도망쳤다. 시하누크 왕은 다시 중국으로 피신한다.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과 펑진(彭眞), 노로돔 시하
누크 前국왕 (왼쪽부터). [출처=위키피디아]

이어 캄보디아, 베트남, 중국까지 개입한 내전이 10여년 간 이어졌고 유엔(UN) 주도로 1991년 도쿄에서 회의가 열려 내전이 종식된다. 월남전 당시 북베트남을 지원했었고, 중국과도 가까웠던 덕분에 캄보디아의 정체(政體)는 입헌군주제로 결정된다.

1993년 총선거에서 펑신페크당 당수였던 시하누크의 차남 라나리드가 제1총리에 올랐고, 친베트남계 인민당의 훈센이 제2총리가 됐다. 이 해 9월 시하누크는 국왕에 즉위해 다시 입헌군주국으로 돌아왔다. 1955년 이후 38년만에 다시 왕위에 올랐지만 1970년에 잃은 실권을 되찾지는 못한 셈이다.

▶‘조용한 국왕’시하모니=노로돔 시하누크는 1993년부터 10년 넘게 왕위에 앉아있었지만 실권과는 거리가 멀었다. 2004년 그의 아들인 노로돔 시하모니(1953~)가 양위를 받아 왕관을 썼지만, 그 역시 ‘조용한 국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움직임이 없었다.

아들이자 현 국왕의 이복형인 라나리드왕자도 1997년 훈 센의 쿠데타로 해외로 도피하면서 왕실과 권력의 관계는 완전히 단절됐다.

시하모니 왕은 미혼인데다 독신이다. 그는 정치보다는 무용과 영화 등 문화가 더 관심분야다. 어린 시절을 프랑스와 체코에서 보냈고 북한에서 영화를 공부한 것으로 전해졌다. 1981년엔 프랑스 파리의 마리우스 프티파 예술학교, 가브리엘 포레 예술학교 등에서 발레 교수를 지냈고, 영화 감독으로도 일했다. 1993년엔 유네스코 캄보디아대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즉위한지 10여 년이 지났어도 그의 소식은 드문드문 전해질 뿐이다. 프놈펜포스트는 왕의 측근들을 인용해, “독서와 명상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그는 유럽산 초콜릿을 구해 먹으며, 식사도 항상 혼자서만 하고 종교행사에도 경호원만 대동한채 혼자 참석한다”고 알라졌다.

시소와스 모나봉과 노로돔 시아누크가 100여년 가까이 독립을 통해 절대권력을 추구했지만, 독립된 캄보디아에서 국왕은 결국 상징적인 존재로 남게 된 셈이다.

문영규 기자/ygmoo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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