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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의 민낯-승정원일기 28]싸우자는 김상헌도, 화친하자는 최명길도 모두 충신
인조 14년(1636) 12월 9일, 청나라 태종이 13만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임경업 장군이 지키는 의주의 백마산성을 우회하여 14일에 청나라 선봉대가 홍제원에 도착하자, 다급해진 인조는 그날 밤에 남한산성으로 파천하였다. 남한산성에는 군사 1만3000명을 포함하여 1만5000명이 있었는데, 식량 1만4300석은 50일을 버틸 수 있는 정도였다.

청나라는 15일부터 남한산성을 포위하였고, 청태종은 1월 1일에 도착하여 17일 최후통첩을 보내 왔다. 인조는 김상헌과 정온 등 척화파의 반대를 물리치고 최명길 등 주화파의 의견을 수용하여 강화를 결정하였다.

다음날 최명길이 작성한 국서를 놓고 ‘폐하’, ‘신’ 같은 명분과 관련된 용어 사용 여부를 논의할 때, 김상헌이 들어와서 국서를 찢으면서 나라가 망할 때 망하더라도 명분에 어긋나는 항복을 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이에 최명길은 대감이 옳지만 부득이한 상황이라 어쩔 수가 없다고 하면서 찢어진 종이를 주워 붙였다.

결국 인조는 1월 30일 삼전도에서 청나라에 항복하였다.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을 겪는 동안, 최명길은 국가의 존립과 백성의 안녕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면서 화친을 주장하였다. 반면 김상헌은 오랑캐인 청나라와 타협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나라가 망한다고 해도 명분은 지켜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후일 김상헌과 최명길은 각각 다른 일로 청나라로 붙잡혀 갔다가 심양의 감옥에서 다시 만났다. 그곳에서 다시 만난 그들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서로 상대의 처지를 이해하였을까?

청나라는 1644년 북경을 함락하고 명나라를 멸망시켰다. 1645년 2월에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조선으로 돌려보냈는데, 이때 김상헌과 최명길도 함께 돌아왔다. 그후 김상헌의 집안은 왕실의 외척이자 세도 가문으로 크게 흥했지만 최명길의 집안은 쇠락하고 말았다. 두 사람의 충성은 같았지만 결과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크게 달라졌다고 하겠다. 지금 우리는 그런 상황이 닥치면 어느 길을 선택해야 할까.

강대걸(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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