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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리즘 - 홍성원> 아무도 도망치지 않았다
그 곳의 초록(草綠)은 경이로웠다. 수풀은 바늘 하나 꽂을 수 없을 것처럼 빽빽했다. 차라리 밀림이다. 아마존도 댈 게 아니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울컥했다. 분단ㆍ전쟁 이후 ‘금단의 땅’이어서다.

열강의 주판알 튕기기와 좌우를 따지는 이념 탓에 쓰러져 간 무명들의 핏빛 한(恨)을 삼킨 채 모른체 하고 있었다. 중부전선 철원 최전방 소초(GP)에서 목도한 비무장지대(DMZ)의 잔상(殘像)은 20여년이 흘렀어도 생생하다. 북한군 들으라고 밤낮 없이 확성기를 타고 밀림을 유영(游泳)하던 우리 가요는 대치 상황의 아이러니였다. 이게 그토록 북한에 위협적인 존재일 줄은 그땐 미처 몰랐다. 

북한의 DMZ내 도발로 촉발된 군사 충돌 위기를 대화로 풀어낸 남북 고위급 접촉의 ‘8ㆍ25 합의’는 박근혜 정부에서 볼 수 없던 ‘홈런성 타구’였다. 마침 박 대통령이 5년 임기의 딱 절반을 맞는 날이었다. 그의 ‘원칙고수’ 스타일에 박수가 쏟아졌다.

야당 이종걸 원내대표도 “폐쇄적이고 제왕적인 고집불통이 총체적 국정실패로 이어져 가고 있는데 북한 문제에 관한 한 핵심을 찔렀다”고 평가했다. 비록 주체가 불분명해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지뢰도발에 대한 북한의 유감표명을 이끌어냈으니 칭찬에 인색할 것까진 없다. 그는 코너에 몰려 있었다. 2년반 동안 해놓은 건 없는데 경제는 고꾸라지질 위기이고, 속도전식 4대 개혁 동력찾기도 여의치 않아서다. 그러나 ‘8ㆍ25 합의’ 한 방으로 실정(失政)에 쏟아질 비판을 희석시켰다. 야당에선 ‘지적 보따리’를 풀어놓으려고 준비했다가 슬그머니 짐을 싼 모양새다.

어쩌면 박 대통령은 정말 우주의 도움을 받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는 지난 4월 브라질을 방문했을 때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연금술사’에 나오는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도와준다’는 글귀를 인용한 적이 있다. 비판론자들은 이를 각종 패러디에 활용해 희화화했다. 한국의 최고권력자에겐 경제와 통일이 ‘알파요, 오메가’인데, 하나는 죽을 쑤고 있어도 새로운 남북 관계의 전기를 맞이했다는 평가를 받으니 우주발(發) 청와대행(行) 반전카드가 뚝 떨어졌다고 안도할 수 있다.

그러나 명백한 조력자는 우리 장병ㆍ국민이다. 아무도 도망치지 않았다. 북한이 괘씸하다며 전역을 미루고, 전장 투입 대기를 하겠다는 예비역이 즐비했다. 취업난에 시름하는 ‘2030 세대’는 국가관도 미약하고, 자기중심적일 것이란 선입견이 싹 날아갔다. 여기다 대고 북한이 남한 병력이 혼비백산했다고 조작한 건 코미디였다.

정부ㆍ여당은 들떠있는 듯하다. 모처럼만에 공(功)이 생겼으니 그럴 만하다. 일각에선 향후 총ㆍ대선에서의 승리를 거론한다. 그렇다고 여당 의원 거의 전원이 청와대로 우르르 달려가 대통령과 밥을 먹으며 자화자찬하는 건 섣부르다. 심기일전해 앞으로 이어질 대북 협상 전략은 물론 뒤뚱대는 경제 운용 방향까지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그래야 선거에서 집토끼든 산토끼든 도망치지 않게 붙잡아 둘 수 있다. 시간은 많지 않고, ‘사과=유감’ 같은 등식을 받아들이지 않을 깐깐한 세대는 더 늘어갈 것이다.  


홍성원 정치섹션 국회팀장/hongi@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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