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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이 힘겨운 당신에게 주는 두툼한‘소설 처방’
본격적인 휴가철이다. 일에 관한 생각을 떨치고 몸에 휴식을 줄 때이지만 뇌를 편하게 내버려 두지 못하게 되는 것도 현실이다.

앨리스 먼로, 조이스 캐럴 오츠, 제임스 설터 등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베스트셀러 작가까지 32명의 작가가 대신 일에 관한 고민을 떠맡았다. ‘일은 소설에 맡기고 휴가를 떠나요’(홍시)는 이 책의 편저자이자 퓰리처 수상 작가인 리처드 포드의 표현대로 삶을 위한 경쟁이 가장 치열한 시기에 일하는 이들을 위한 소설, 일을 테마로 한 단편소설집이다. 

1940년대 대공황기 외판원 이야기부터 2000년대 후반 금융위기 시대의 불안한 화이트칼라까지 다양한 직장인들의 모습에서 위로와 공감을 나눌 수 있다.

리처드 예이츠의 ‘패배중독자’는 1962년 단편집 ‘맨해튼의 11가지 고독’에 수록된 작품으로 오늘날 직장인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린 시절 전쟁놀이에서 총에 맞아 죽는 역 전담이었던 월터는 이후 학교와 직장 생활까지 늘 그런 식이다. 스포츠에선 부상당하거나 시험엔 낙제, 선거에는 낙방 등 패배의 연속이다. 그런 일에 익숙한 월터는 일이 닥칠 때마다 어떻게 하면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듯 연출하느냐에 집중한다. 새 직장을 갖게 된 월터는 얼마 못가 잘리게 될 걸 예감한다. 그건 아내도 마찬가지. 그리고 그 날은 오고야 만다. 부장은 월터를 불러, 그가 일을 잘 따라오지 못한다며 내보내기로 했다고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한다. 월터는 울음이 터질 것 같지만 목소리가 떨리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기며 태연하게 인사를 하고 나온다. 그리고 자기 자리까지 15미터 거리를 아무렇지 않은 듯 우아하게 걸어간다. 짐을 챙겨 나오면서도 여유를 가장하지만 이내 갈 곳이 없음을 깨닫는다. 집에 들어가기에는 이른 시각, 그는 공립도서관에서 시간을 죽인다. 퇴근길의 익숙했던 풍경들이 어느새 낯설게 느껴진다. 그는 사실을 아내에게 숨기고 일자리 얻을 때까지 버티자고 굳게 결심하지만 이내 무너지고 만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앨리스 먼로의 ‘어떤 여자들’은 열세살 여자아이가 인생에서 처음 갖게 된 일에 관한 이야기이다. 삶의 한 단면을 통해 삶의 비의를 드러내는데 탁월한 먼로는 아이의 시각에서 죽음을 눈 앞에 둔 남자와 주위 여자들의 관계를 예리하게 드러낸다. 전투기조종사로 복무하다 백혈병으로 죽어가는 크로지어의 심부름 수발을 하게 된 나는 의붓아들을 대하는 노부인의 이상한 태도와 안마사 록산느의 쾌활하고 매력적인 모습, 그리고 대학강사로 일하는 크로지어의 아내 실비아 사이에 벌어지는 묘한 기류를 통해 어렴풋이 남녀의 육욕과 사랑의 징그러움에 눈을 뜨게 된다. 맥스 애플의 ‘사업이야기’는 따분한 일상 속에 자아를 잃어가던 전업주부의 탈출기다. 오후 4시면 기분이 울적해지고 5시에는 눈물이 맺힐 정도로 극도의 불안감에 시달리던 나는 뜻맞는 친구 지니와 사업을 구상한다.

남편의 지원사격 아래 냉동요구르트 체인점을 운영하기로 결심하고 식품 대리점주 노먼을 만난다. 노먼은 매력적인 그녀를 추근대기 시작한다. 집시 마켓에 가게 임대까지 마치고 기계까지 설치해 놓자 나는 마음이 들뜨기 시작한다. 머릿 속에 지폐다발이 떠오를 정도다. 사업에 발을 내딛는 순간, 많은 것이 변할 거라는 걸 안다. 돈을 몽땅 날릴 수도 있고 노먼이랑 눈이 맞을 수도 있고 동업자와 틀어질 수도, 아이들에게 소홀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게임은 시작됐다. 영미권의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자인 조이스 캐럴 오츠의 ‘하이론섬’은 느와르 풍이다. 우유 썩은 내, 건초 냄새로 악취를 풍기는 농부 팝에 관한 얘기다. 의붓아버지인 그를 엄마는 늘 창피하게 여기며 대접해 주지 않는다.

종일 헛간에서 살다시피하고 외로우면 현관 발치에 사과주 술병을 끼고 앉아 외로움과 시름을 달래는 팝은 유일한 낙이 밴조를 켜고 노래를 부르는 일이다. 어벙벙한 팝이 일을 당한 건 농장에서 10킬로미터 떨어진 허키머 도로변. 팝은 트럭을 몰고 가다 스트립걸로 위장한 경찰의 덫에 걸려 성매매 현행범으로 체포된다. 당시 위장근무중이었던 보안관 대리 사촌 드레이크는 그 일을 모른 척한다. 수치와 모욕감에 팝은 마침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나는 팝에게 “경찰이 더러운 술수로 엄한 사람을 잡았다”고 위로해주고 싶었지만 엉뚱한 말만 내뱉은 걸 후회한다. 팝의 장례식 일주일 후 술집에서 마주친 드레이크가 아는 체 하지 않는데 격동한 나는 범행을 기획한다.

두툼한 소설집에는 이 외에 줌파 라히리의 ‘병을 옮기는 남자’,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약국’, 흑인 작가 최초로 퓰리처상을 받은 제임스 앨런 맥퍼슨의 ‘닥터를 위한 솔로 송’ 등 강한 개성을 지닌 작가들의 대표작들이 들어있다.

소설집의 편저자 리처드 포드가 털어놓은 자전적 이야기도 지나치기 어렵다. 포드는 1935년 대공황 시절 여행사 영업사원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아버지의 모습을 들려준다. 1960년 죽는 날까지 그 자리를 지킨 아버지의 일상은 책상에 앉아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외롭고 답답하고 지루한 일상이었지만 아버지에게 그런 것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직업이 없으면 내세울 자존심도 마뜩잖았고 먹고 살기도 힘들었다. 당연히 임금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일은 곧 아버지의 존재 이유였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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