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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의 맛] 음악영화라면 ‘러덜리스’처럼
[헤럴드경제=이혜미 기자] ‘러덜리스(rudderless)’. 키를 잃은 배처럼 갈팡질팡하는 상태를 뜻한다. 뜻하지 않은 사고로 아들을 떠나보낸 샘(빌리 크루덥 분)은 번듯한 직장을 박차고 요트에서 은둔 생활을 시작한다. 샘은 시간이 흘러도 아들을 잃은 상실감을 떨쳐내지 못한다. 술에 절어 지내던 그는 우연히 클럽의 라이브 무대에 오른다. 샘의 노래에 반한 쿠엔틴(안톤 옐친 분)은 그에게 밴드를 제안하고, 우여곡절 끝에 ‘러덜리스’라는 이름의 밴드가 결성된다. 밴드는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노래로 사랑 받지만, 그 곡들의 주인이 샘이 아닌 죽은 아들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밴드는 흔들린다.

아들이 죽기 전, 샘과 아들의 관계를 이어준 것은 음악이었다. 둘은 대화는 많지 않았지만 음악이라는 관심사를 공유하며 유대감을 가졌다. 아들이 죽은 후에도 부자관계는 ‘음악’이라는 끈으로 연결된다. 샘은 아들이 남긴 데모 CD를 우연히 들은 뒤, 미처 몰랐던 그의 심연과 마주한다. 샘이 밴드에서 아들의 노래를 부른 건, 생전 그의 아픔을 알아채지 못한 미안함과 후회스러움의 표현일 것이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자신의 아들은 이처럼 아름다운 노래를 만드는 소중한 존재였다는 항변처럼 보이기도 한다.

극 중 샘과 밴드는 서정적인 멜로디의 포크곡부터 어깨를 들썩이게 하는 록 음악까지 다양한 무대를 선보인다. 음악영화의 핵심은 극의 정서와 등장인물의 감정을 관통하는 곡들이 얼마나 적재적소에 배치됐느냐일 것. 샘의 아들이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설명하는 회상 씬이나 회고담은 불필요하다. 데모 CD에 녹음된 그의 목소리와 노랫말, 멜로디면 충분하다. ‘러덜리스’에 삽입된 여섯 곡은 삶에 좌절하고 외로워하면서도 사랑의 힘을 믿었던 평범한 20대 청년을 관객들 앞에 데려다놓는다. 

음악을 빼놓고 보더라도 ‘러덜리스’는 드라마 만으로도 충분히 훌륭한 영화다. 중년의 샘과 청년 쿠엔틴의 관계는 흥미롭다. 쿠엔틴은 음악적 재능은 출중하지만 소심하다. 무대 울렁증 때문에 사람들 앞에 서는 일이 고역이고, 마음에 드는 이성 앞에서 말도 제대로 못 꺼낸다. 샘은 그런 쿠엔틴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주고, 마침내 그가 쓴 곡이 세상의 빛을 볼 수 있도록 이끈다. 그렇게 샘은 쿠엔틴을 만나 아버지의 역할을 되찾고, 동시에 음악을 통해 죽은 아들과도 제대로 마주한다. 특히 영화의 중대한 반전은, 드라마의 결을 보다 풍성하게 만든다. 이 반전은 다수의 지지와 동정을 받는 쪽이 아니라, 우리가 외면했던 이들의 아픔에 대해서도 한 번쯤 생각해보게 한다.

‘러덜리스’의 마지막 장면은 영화를 통틀어 가장 큰 울림을 준다. 그동안 아들이 쓴 노랫말만 불렀던 샘이, 아들이 남긴 곡에 직접 가사를 붙여 무대에 오른다. 아들의 죽음에 대해 입을 연 적 없던 그가,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기로 한 것이다. 마침내 샘에게 아들의 이야기를 꺼낼 용기가 생겼다는 건, 그가 비로소 자신에 대한 원망과 죄의식에서 구원받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샘의 노래는 아들을 향한 절절한 독백이다. 노래가 끝나면 여운을 깨트리는 사족 없이 엔딩 크레딧이 올라온다. 흘러내린 눈물을 훔쳐낼 틈 없이 극장이 밝아져 당혹스러울 수 있다. (만족 지수 ★★★★)

ham@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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