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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평해전’ ‘소수의견’에 누가 정치색을 씌우나
극장가에 다시 불붙은 이념 논쟁
극과 극 평점부터 개인혐오 표출까지
보수와 진보 자의적 해석 ‘편 가르기’

의도치 않은 공방에 감독들도 당혹
투자-배급사 꺼리는 분위기될라 우려


영화를 둘러싼 이념 논쟁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화려한 휴가’(2007)와 ‘26년’(2012)은 광주민주화항쟁을 다뤘다는 이유로 ‘빨갱이 영화’ 딱지가 붙었다. ‘변호인’(2013)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변호사 시절을 모티브로 한 영화라는 이유로 보수층의 반감을 샀다. 지난 해 1000만 관객을 모은 ‘국제시장’도 부당하게 정치색이 덧씌워진 영화 중 하나였다. 단순 시대상을 반영한 국기에 대한 경례 장면을 두고, 박근혜 대통령이 ‘그렇게 해야 공동체가 건전하게 발전할 수 있다’는 의미 부여를 한 것도 의도치 않은 색깔을 띠는 데 한 몫을 했지만…. 그저 아버지 세대의 노고에 대한 헌사를 보내고 싶었던 감독으로선 답답할 일이었다. 없는 의도까지 만들어내 정치적 잣대를 들이대니 말이다. 

최근 극장가에 또 다시 이념 논쟁이 불 붙었다. 지난 25일 나란히 개봉한 ‘연평해전’(감독 김학순)과 ‘소수의견’(감독 김성제)이 논란의 주인공이다. ‘연평해전’과 ‘용산참사’(정확히는 ‘용산참사’ 모티브의 사건)라는 소재 만으로 개봉 전부터 ‘편 가르기’가 시작됐다. ‘연평해전’에는 보수 성향, ‘소수의견’에는 진보 성향 네티즌들이 몰렸다. 개봉 후에도 영화 자체에 대한 평가는 뒷전으로 밀렸다. 특정 사건을 다뤘다는 이유 만으로 ‘전 국민이 봐야할 영화’ 혹은 ‘쓰레기 선동 영화’로 평가가 극단을 오가고 있다. 감독과 제작ㆍ배급사, 출연 배우는 특정 이념을 지지하는 것으로 낙인 찍히기도 한다.

▶‘10점 아니면 0점’…개봉 전부터 포털 평점 전쟁=10점 아니면 0점. ‘연평해전’과 ‘소수의견’에는 개봉일이 정해지지도 않은 시점부터 극단적인 평점이 매겨졌다. 개봉 전인 영화에 평점을 매긴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한 일이다. 몇 줄의 시놉시스, 혹은 감독이나 배우의 이름만 보고 점수를 매긴다는 것인데, 굳이 이 같은 시스템을 유지하는 포털 사이트의 행태도 문제다. 평점란이 특정 배우와 감독, 소재에 대한 개인적인 혐오를 표출하는 공간으로 변질되는 경우가 많다.

개봉 후에 포털 사이트 평점란은 더욱 치열한 전쟁터가 된다. 재미있는 것은 이념 논란에 휘말린 영화들의 경우, 평점에 참여한 일반 네티즌의 수가 실 관람객 수보다 압도적으로 높다는 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10점 혹은 0점을 줄 준비가 된 이들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연평해전’의 경우 네이버에서 일반 네티즌 1만2170명, 실 관람객 1167명이 평점을 매겼다. 일반 네티즌이 실 관람객보다 10배 이상 많았다. ‘소수의견’ 역시 일반 네티즌(1642명)과 실 관람객(178명) 수가 10배 가량 차이났다. 두 영화와 달리 이념 논쟁에서 자유로운 ‘극비수사’(감독 곽경택)는 일반 네티즌 3926명, 실 관람객 1274명이 평점에 참여, 3배 가량 차이를 보였다. 블록버스터 ‘쥬라기 월드’ 역시 평점에 참여한 일반 네티즌이 1만1865명, 실 관람객이 4118명으로 3배 차가 났다.(30일 오후 8시 기준)

▶툭하면 ‘뉴스특보’? 낯 뜨거운 밀어주기= 영화를 둘러싼 네티즌들의 이념 공방은, 여전히 좌우 대립이 극렬한 사회의 단면을 반영한다. 씁쓸하지만 우리 사회의 현주소이기에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이보다 안타까운 것은 언론이나 정치권에서 앞장서 특정 영화에 정치색을 입히는 모습이다.

최근 보수 언론의 ‘연평해전’ 밀어주기(?)는 낯 뜨거운 수준이다. TV조선은 연일 ‘연평해전’ 관련 보도를 쏟아내고 있다. 물론 올해 개봉한 한국영화 가운데 가장 빠른 흥행 속도를 기록하며 흥행 중인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영화 개봉 소식부터 ‘100만 관객 임박’, ‘이틀 째 박스오피스 1위’ 등을 일일이 ‘뉴스 특보’로 보도하는 것은 호들갑스럽다. 100만 관객 ‘돌파’도 아닌 ‘임박’이라니….

일부 정치인들이 영화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 또한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특정 영화를 지지하는 건 개인의 취향이지만,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노림수가 보이니 껄끄럽다. ‘연평해전’은 애국심을 고취하고, 안보에 대한 경각심을 높일 수 있는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집권당은 호재라고 여긴 듯하다. 김진태 새누리당 의원은 ‘연평해전’을 본 뒤 ‘대통령 한 번 잘못 뽑으면 이렇게 된다’는 말로 전 대통령을 겨냥했다. 홍준표 경남도지사 역시 ‘영결식보다 일본에서 거행된 월드컵 폐막식에 참석한 대통령을 보고 얼마나 국가를 원망했을까’라고 순수한 애도에서 벗어난 감상평을 남겼다.

정치권의 자의적 해석과 별개로 ‘연평해전’은 2002년 월드컵 열기 속에서 잊혀진 희생 장병들을 기억하려는 영화다. 김학순 감독은 오직 ‘사람’에 집중하고자 하는 의도에 충실한 연출을 해낸다. 드라마틱한 개인사가 곁들여지긴 했지만, 연평해전 발발 전 장병들의 일상을 비교적 담담하게 따라가는 점이 인상적이다. 철거 현장에서 벌어진 참사가 소재일 뿐, ‘소수의견’ 역시 담백한 법정영화의 형식을 취한다. 일각의 선입견과 달리 감독은 어떤 정치적 입장도 견지하지 않는다. 극 중 철거민을 돕는 시민단체의 사무국장과 야당 의원 모두 결국엔 참사를 각자의 이해에 맞게 이용한다. 결말 또한 어느 한 쪽의 승리가 아닌, 죽은 경찰의 아버지와 철거민이 마주한 채 눈물을 흘리는 장면으로 끝맺으며 비극을 묵묵히 응시한다. 실제로 김성제 감독은 여당·야당·검사·변호사·시민사회 사무국장 등 다양한 입장 차를 보여주며 한국 사회의 풍경을 담아내길 의도했다.

▶“좌우 떠나 잘 만든 영화면 누가 뭐라고 할까”=‘연평해전’과 ‘소수의견’의 사례에서 보듯, 사회적으로 민감한 소재가 스크린에 옮겨질 때마다 이념 논쟁이 통과의례가 된다. 영화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무리도 따라붙는다. 그렇다 보니 제작 단계부터 난항을 겪는 일이 허다하다. 제작사와 감독이 용기를 낸다고 하더라도, 배우 캐스팅에서 좌절을 맛보기도 한다. 더 큰 난관은 투자자와 배급사를 찾는 일이다. 이들이 영화에 참여하길 기피한다면 제작은 물론, 개봉도 요원한 일이다. 실제로 ‘소수의견’은 배급을 맡기로 했던 CJ E&M이 마음을 바꾸면서, 2년 간 표류하던 중 시네마서비스를 통해 빛을 보게 됐다. 다사다난한 제작 과정은 ‘연평해전’도 마찬가지다. 제작 당시부터 제작자가 바뀌는 등 우여곡절을 겪으며 개봉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논란이 일 만한 소재를 다루길 꺼려하는 분위기가 영화계에 자리잡을까 우려스러운 면이 있다.

영화계의 이념 논쟁에 정지욱 영화평론가는 씁쓸함을 표시하면서도 ‘잘 만든 영화’의 힘을 낙관했다. 그는 “실화 영화는 잘 알려진 사건을 다루지만, 영화를 통해 우리가 미처 몰랐던 부분을 알게 해준다는 의미가 있다”며 “‘연평해전’은 이 땅의 젊은이들의 희생을 담은 영화라는 점에서, ‘소수의견’을 본 관객들도 가서 볼 가치가 충분하다. 마찬가지로 ‘연평해전’에 열광하는 이들도 잘 만든 법정영화인 ‘소수의견’을 편견없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혜미 기자/ham@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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