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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찢겨나간 한국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채워넣다다
역사적 진실과 도덕적 양심 사이…회고록 낸 그레그
엄혹한 시절 CIA지국장·주한대사 지내
김대중 납치사건, 광주·평양 방문 등
민감한 역사적 현장 생생히 증언
美 동아시아 정책 일단 읽을수 있어
인간에 대한 진지한 태도에 진정성



“인간은 타고난 본성을 가진 게 아니다. 역사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역사는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한다”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 대사가 회고록 ‘역사의 파편들’(창비) 서문에 쓴 그의 철학적 신념이다. 역사적 진실과 도덕적 양심을 놓치지 않으려 애쓴 모습으로 읽힌다. 

재직 당시부터 지금까지 한반도 긴장 완화에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그레그의 회고록은 한국 관련 부분이 분량면에선 많지 않지만 무게감은 작지 않다. 일본과 미얀마에서 활동했던 시절이 낭만적인 추억을 회상하는 쪽이라면 한국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들을 담고 있어 눈길을 끈다.

베트남 근무에 이어 CIA지국장으로 서울에 온 그가 당면한 첫 과제는 김대중 납치사건이었다. 1973년 8월초 미군 장교클럽 리셉션에 참석중이던 그는 하비브 미 대사의 부름에 김대중이 도쿄 호텔방에서 납치된 사건을 접하게 된다. 하비브는 당장 그를 데려간 게 누군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라고 요청한다. 그레그는 다음날 아침 한국중앙정보부가 김대중을 납치했고 쓰시마 해협 어딘가에 떠 있는 소형 선박 위에 있다는 보고를 올린다. 하비브는 즉각 박 대통령에게 긴급메시지를 보냈다. 김대중 납치에 대해 알고 있으며 김이 죽는다면 미국과 서울의 관계가 끝장날 우려가 있다고 전하고 살릴 수 있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라고 압박한 것이다. 그레그에 따르면 하비브의 이런 행동은 대통령의 체면을 살리는 묘책이었다. 박 대통령과 직접 대면해 당혹감을 주는 대신 ‘불한당같은 부류들이 비열한 짓을 시도했기 때문에 대통령 자신이 신속히 개입해 저지했다’는 스토리를 꾸며내게 할 시간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레그는 김대중 대통령이 2009년 사망하기 1년 전, 박 대통령이 자신을 납치해 죽이라고 명령한 증거를 갖고 있다는 말을 했다고 덧붙였다. 그레그의 생생한 이야기는 역사의 한 페이지, 뭔가 미진한 게 채워지는 느낌을 준다. 

그의 회고록 중 또 다른 흥미로운 대목은 박정희 정권의 주요 인물에 대한 평가다. 이후락 중앙정보부 부장을 만나자마자 혐오감을 갖게 됐다든지, 박종규 대통령경호실장은 자신이 상당히 좋아했던 사람이라며, 자기 주인을 보호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헌신하는 일본의 사무라이를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라고 평한 것 등이다. 특히 남북관계 화해노력을 높이 평가하며, 노태우 대통령이 유능한데도 평가절하돼 있다고 지적한 것도 새롭다.

그레그는 김대중 납치사건과 관련된 서울대 최종길 교수의 고문치사 사건의 야만적 행위를 중앙정보부에 항의하려 워싱턴에 동의를 구했다가 거절당한 얘기도 털어놨다. “한국인을 한국인으로부터 구하는 일은 중단하고 사실만 보고하는데 집중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는 이에 중대한 도덕적 위기감을 느꼈다며, 처음이자 유일하게 상부의 지시를 어기고 박종규를 찾아갔다고 밝혔다.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로 자국민들을 고문하면서 북한의 위협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그런 조직과 함께 일하는 것이 너무나 힘들다”는 입장을 밝힌 것. 이후 열흘이 지나지 않아 이후락 부장은 해임됐다.

그는 1989년 미 대사로 두번째 한국에 부임한다.

1990년 1월 그는 반미시위가 끊이지 않는 광주를 찾는다. 광주는 참극에 미국이 개입했다고 여겼고, 광주 미 문화원에 화염병 투척도 계속 이어졌다. 그런 속에서 시민대표들과 회견하고 “너무 대처가 늦었던 것에 사과한다”며 정면돌파를 시도한 것. 그는 이 때의 경험을 한국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한을 품을 수 있는가를 본 소중한 경험이었다고 말한다. 2002년 처음 평양에 갔을 때도 광주에서와 똑같은 ‘한’의 감정을 접했다는 것. “광주와 평양에서 내가 바로 깨닫게 된 것은 내가 상대하는 사람들이 어떤 광적인 집단이 아니라 진정한 한국인들이라는 것, 그리고 일단 내가 자기들의 인간성을 존중한다는 걸 알고 나면 그들도 나를 인간적으로 대해준다는 사실이었다.”

그레그는 미 대사로 봉직기간 중 미국의 최악의 실수로 팀스피릿 훈련 재개를 꼽았다. 펜타곤과 한국 국방부를 설득, 1992년 팀스피릿 훈련 취소를 어렵게 끌어냈는데 92년 가을 펜타곤 연례회의에서 이듬해 3월 다시 훈련을 하기로 뒤집은 것. 팀스피릿 재개는 평양 측의 반발과 함께 준전시체제로 전환하며 핵확산방지조약탈퇴, 북한 핵보유의 길을 열어주게 된다.

회고록은 CIA 요원으로 일본, 베트남, 미얀마, 한국 등에서 일한 뒤 주한 대사까지 지낸 그가 직접 보고 겪은 기록이라는 점에서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의 일단을 읽을 수 있다. 특히 이 회고록의 미덕은 굵직한 역사적 사건보다 저자의 인간에 대한 태도에 있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이해가 글의 진정성을 더해준다. 회고록 집필에는 4년이 걸렸다. CIA 요원은 일기를 쓰는 것이 금지돼 있어 그는 오로지 기억에 의존해 회고록을 써야 했다. 원고는 CIA와 미 국무부, 백악관의 검열을 받고 지난해 미국에서 출간됐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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