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정진영 기자] MBC 수목드라마 ‘앵그리맘’의 OST는 한국 대중음악계의 일대 사건이었다. 빅밴드부터 비밥까지, 한국 가요계에서 좀처럼 들을 수 없는 재즈의 선율이 황금 시간대에 방송되는 드라마의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온 것이다. 재즈 선율이 다소 무거운 주제를 가진 드라마의 분위기와 따로 움직이는 것 아니냐는 우려는 기우에 불과했다. 경쾌한 액션 장면에도, 심각한 장면에도 절묘하게 녹아든 재즈 선율은 시청자들의 드라마 몰입도를 높였다. 적어도 이 드라마 속에 담긴 재즈는 “재즈 어려운 음악”이란 선입견을 잊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새로운 시도는 늘 어려운 법, 이 시도의 중심엔 드라마의 음악감독을 맡은 팝재즈그룹 윈터플레이의 리더 이주한이 있었다.
지난 12일 오후 서울 명동성당 마리아홀에서 ‘앵그리맘’ OST 음악감상회가 열렸다. 이 자리엔 이주한을 비롯해 드라마를 연출한 최병길 감독, OST를 제작한 라우드피그의 재키곽 대표가 참석했다.
이주한은 “지난해 12월 최 감독으로 처음 음악감독을 제안 받았는데, 온전히 재즈를 담아낸 OST는 그동안 없었기 때문에 재미있을 것 같아 참여하게 됐다”며 “윈터플레이로 재즈를 하는 것도 한국에선 모험이지만 이번 OST는 그야말로 도전의 연속이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날 이주한은 재즈를 배경으로 자주 활용하는 우디 앨런의 영화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해피 매직(Happy Magic)’을 비롯해 ‘베스트 홈(Best Home)’, 골든스윙밴드 보컬 김민희가 노래를 부른 흥겨운 빅밴드 재즈 ‘앵그리맘(Angry Mom)’, ‘애쉬번’이란 이름으로 가수로도 활동 중인 최 감독이 직접 노래를 부른 ‘서니 사이드 업(Sunny Side Up)’, ‘포테이토 택시(Potato Taxi)’ 등 14곡을 들려주며 설명을 이어갔다.
재키곽 대표는 “재즈 연주자들 사이에선 ‘이제 음악만으로는 안 된다’ ‘음악을 하는 사람 자체가 이슈가 돼야 한다’ 등의 불안한 공감대가 형성돼 있어 돌파구를 고민 중이었는데 최 감독의 제안이 힘이 됐다”며 “정말 무모할 정도로 투자해 완성도 높은 OST를 만들고자 매달렸다”고 말했다.
최 감독은 “‘앵그리맘’은 극본 공모를 통해 내가 직접 뽑은 작품인데 이렇게 연출까지 맡게 될 줄 몰랐다”며 “한국의 코미디에 담기는 전형적인 음악을 담고 싶지 않았는데 우디 앨런 영화의 재즈가 떠올랐고, 음악감독을 찾다보니 대중성과 음악성을 겸비한 이주한이 있었다”고 뒷이야기를 전했다.
이주한은 그동안 많은 드라마와 영화의 OST에 연주자로 참여한 바 있지만 음악감독까지 맡은 것은 처음이다. 방송 직전까지 편집이 이뤄지는 드라마의 특성상 OST의 전곡을 직접 작곡하는 일은 무모한 일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주한은 4개월여 간 50곡을 작곡하는 강행군을 펼쳤다.
이주한은 “언제 어느 영상이 나올지 몰라 신났고, 내가 이렇게 곡을 빨리 쓸 수 있는지 몰랐다”고 너스레를 떨며 “재즈는 시대가 지났고 시장도 없지만 매우 아름다운 음악이고 OST로 만드는 것 또한 쉽지 않은 기회이기 때문에 시청자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한곡 한곡 많은 신경을 썼다”고 했다. 재키곽 대표는 “방송 시간이 5시간도 남지 않았는데 작곡에 매달리는 일도 있었다”며 “그동안 만들어 둔 곡들을 뒤지지 않고 매회 영상에 어울리는 새로운 곡을 만드는 모습을 보고 많이 놀랐다”고 회상했다.
‘앵그리맘’ OST는 기존 한국 드라마 OST 제작 과정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드라마 OST 제작은 대개 타이틀곡(주로 발라드)을 히트시켜 그 음원 수익으로 제작비를 마련한 뒤 나머지 곡을 만드는 구조로 이뤄진다. 앨범으로서 완성도 높은 OST가 드문 이유이다. 그러나 ‘앵그리맘’ OST는 많은 제작비를 들여 국내 정상급 연주자들을 세션으로 기용하는 등 OST 제작에선 유례를 찾기 힘든 모습을 보여줬다.
이주한은 “보통 OST 제작비용보다 최소한 2.5~3배 이상의 금액이 투입된 것으로 아는데, 재즈가 대중적인 음악이 아니다보니 음원 수익은 그리 높지 않았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OST를 만들어 다른 재즈 연주자들을 위한 앞길을 열어주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또한 추후 피지컬(CD)로 출시되는 OST는 2장의 CD로 구성된 더블앨범으로 발매된다. 한국인 출신으로 유일하게 그래미 어워드에서 수상한 세계적인 엔지니어 황병준이 마스터링을 맡는다. 무모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파격적인 행보이다. 이주한은 “재즈를 잘 모르겠다면 드라마만 봐도 충분할 정도로 다양한 재즈가 OST에 담겨 있다”고 자신감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