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고승희의 채널고정] ‘보고 또 보고’부터 ‘압구정백야’까지…전지전능했던 ‘임성한 월드’가 남긴 것
김성진=방송사가 정신 차렸을리는 없다. 다만 마약같은 막장 시청률에 홀리는 시대는 끝나기를…

고승희=주입식 교육의 대가, 빨려들다가도 지구인이라 정신 차려요 ★★

이혜미=한국 드라마계에 전무후무한 족적을 남긴 논란의 작가 ★☆

정진영=한국 드라마 계에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게 만든 시발점. 시청률이 높다고 반드시 좋은 드라마는 아니다.(클릭 수가 높다고 좋은 기사는 아니다!!!!) ★☆

전지전능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했던 임성한 작가는 최근 “드라마는 10편까지만 쓸 계획이었다. 원없이 썼다”며 은퇴를 공식화했다. 장근수 MBC 드라마본부장은 “임성한 작가와 차기작 계약을 하지 않았다”며 “앞으로 임 작가의 드라마를 편성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MBC와 임 작가의 공고했던 관계도, 임 작가의 작품도 현재로선 MBC 일일드라마 ‘압구정백야’가 마지막인 셈이다.

임성한 작가는 1998년 첫 방송된 ‘보고 또 보고’(MBC) 이후 매회 한 편씩 꾸준히 써왔다. 지난해 종영한 ‘오로라공주’(MBC)만이 남편 손문권 PD의 자살로 2년의 공백기가 생긴 작품이었다. 첫 장편 ‘보고 또 보고’ 이후 ‘온달 왕자들’, ‘인어 아가씨’, ‘왕꽃 선녀님’, ‘하늘이시여’, ‘아현동 마님’, ‘보석비빔밥’, ‘신기생뎐’, ‘오로라 공주’, ‘압구정 백야’까지 임 작가의 작품은 소위 ‘욕드’(욕하면서 보는 드라마)ㆍ‘복드’(복장 터져도 보는 드라마)의 대명사로 불렸다.

▶ 막장의 출발=임성한 작가에겐 본인으로선 결코 달갑지 않을 수사들이 따라온다. ‘막장의 여신’으로 안방에 군림하며 일일ㆍ주말드라마의 패러다임을 바꿨다는 평가다.

드라마평론가인 윤석진 충남대 교수는 “임성한 작가는 독특한 자기세계를 가진 작가였다. 시청자들의 원성이 높으면 그 목소리를 작품에 반영하기도 하지만, 임 작가의 경우 ‘내 갈 길을 간다’는 방식을 고수했다”며 “신과 같은 입장에서 자기 세계를 구축하며 ‘임성한 월드’로 불렸다”고 말했다. 때문에 김선영 TV평론가는 “자극적인 소재와 무리한 설정, 드라마의 기본적인 개연성을 무시한 전개로 홈드라마를 막장드라마와 동의어로 만든 장본인”이라고 평했고,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주부들의 욕망과 관심사를 노골적으로 표현하며 우리나라 드라마를 통속적이고 자극적인 방향으로 이끌고, 이 같은 설정을 보편화한 작가”라고 꼬집었다.

‘임성한 월드’엔 불가능이란 없다. “허구의 세계에선 다양한 소재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작가주의’에 힘 입어 드라마엔 ‘불량식품’ 같은 자극이 촘촘히 채워졌다.

뒤죽박죽 엉켜버린 혈연관계와 겹사돈 등의 설정으로 가족드라마의 새 지평을 열었고, 드라마의 전체 스토리와는 무관한 등장인물들의 난데없는 죽음, 개인적인 음식 취향에 대한 고찰과 예의범절 등 작가 가치관의 고집스러운 설파는 시청자를 공황에 빠뜨리게 할 만한 요소였다. 특히 ‘왕꽃 선녀님’ 이후 임 작가의 무속신앙에 대한 집착이 넘쳐나며 개연성이 흔들리자 논란은 커졌다. 보편적 가치관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뜬금없는 설정만 도드라졌기 때문이다. 또한 의도적인 분위기 전환만을 노리며 사망자 11명을 배출하는 칼부림(‘오로라공주’)에 작가 ‘퇴출운동’도 일었다. 작가권력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는 부분이다.

김선영 평론가는 “자신이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배우를 캐스팅해 작가의 가치관을 인물들의 대사로 풀어내며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려는 방식은 드라마의 작법을 중요시하는 시청자들에겐 기본을 무시하고 있다는 평가를 나오게 한다”고 지적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다=임성한 작가의 드라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높은 인기를 모았다. 자극과 논란의 법칙은 모조리 통했다. 작가가 “초당 시청률 추이까지 분석해 다음 에피소드에 인기 장면을 반영”하는 치밀함은 시청자의 ‘욕구 포인트’를 귀신같이 알아내고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겹사돈을 소재로 당시 브라운관에 신드롬에 가까운 인기를 불러온 MBC ‘보고 또 보고’(1999)는 최종회에서 57.3%(닐슨코리아 집계, 전국 기준)의 진기록을 냈으며, 임 작가의 작품은 ‘오로라공주’ 이전까지 꾸준히 20%대의 시청률을 넘어서며 흥행 보증수표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 출연배우들이 한결같이 “대본이 너무 재밌다”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임성한 작가의 장점은 스토리 구성 능력에 있다. 때문에 열 편의 드라마를 아우르면, “혈연관계를 비트는 자극적인 설정이 난무하면서도 임 작가의 드라마를 통해 한국사회가 얼마나 건강하지 못하냐를 단적으로 보여줬으며, 과장되고 허무맹랑하지만 그게 우리의 모습이라는 점을 들춰냈다”(윤석진 충남대 교수)는 평가도 나온다.

특히 임 작가의 초기작으로부터 이어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홈드라마의 틀 안에서 당당하고 똑부러진 여주인공이 온갖 시련과 역경을 극복하는 성공기를 그렸다는 점이다. “신데렐라 스토리를 바탕으로 한 여주인공의 성공기가 우리 시대의 속물근성을 건드리고”(김선영 평론가), 독특한 특징이 살아난 등장인물들은 ‘블랙코미디’ 한 편을 보는 것처럼 진기하다.

김선영 평론가는 “임성한 작가만의 독특한 유머가 있다. 이는 드라마인지 시트콤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캐릭터를 통해 나온다”며 “말발이 뒤지지 않는 캐릭터들이 세게 부딪히면서 시트콤적인 요소가 살아난다. 보편성에서는 벗어난 엉뚱한 캐릭터와 대사는 중년 시청자의 ‘개그콘서트’와 같다”고 말했다.

애초 타깃 시청층이 주부세대라는 것을 감안하면 시청자들의 욕구를 간파한 접근이다. 김 평론가는 “요리에 대한 특유의 집착과 맛집 소개, 건강식에 대한 예찬이나 세상사를 주인공들의 대화를 통해 주절거리며 풀어가는 방식은 종편의 토크쇼가 소소한 일상을 다루는 방식으로 철저하게 중년관객의 취향에 맞췄다”고 말했고, 하재근 평론가 역시 “이야기를 재미있게 끌고 나가는 능력에 주부 시청자가 관심을 가질 만한 소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한다. 특히 자신의 취향과 시청자의 취향을 접합시키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말했다.

▶ 이젠 굿바이? 은퇴 선언=지금껏 드라마 작가가 ‘은퇴’를 공식화한 사례는 없었다. 사실 ‘은퇴’라는 표현은 모호하다. 이 단어를 입에 올릴만한 ‘스타작가’도 드물었으며, 작가들은 흔히 ‘은퇴’라는 표현은 쓰지 않는다고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은퇴라고 말하긴 했지만 언제라도 본인이 원하면 돌아올 수 있는 것 아니겠냐”는 업계 반응이 괜한 소리는 아니다.

일각에서는 “뼈를 깎는 고통으로 글을 쓴다”는 항변과는 무관하게도 유독 임 작가를 향해 쏟아지는 비난 여론이 ‘은퇴 선언’에 적지 않은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윤석진 교수는 “안방 드라마에 무수히 많은 막장 요소를 가진 드라마가 등장해도 임 작가만이 유독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됐다. 임 작가는 시청률과 별개로 이슈메이커로의 역할을 해왔는데, 대중의 입장에서 만만하다고 바라보는 시각이 있었다”고 말했고, 하재근 평론가는 “그간의 작품들을 통해 조롱받은 피로함이 은퇴 선언으로 이어졌을 것으로도 보인다”고 풀이했다.

고승희 기자/shee@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