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시계
실시간 뉴스
  • [문영규 기자의 세계戰史 엿보기]100년 전 갈리폴리 전투, 그때를 아십니까-①
인류의 역사는 끊임없는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금 이순간에도 여전히 지구촌 어딘가에서는 전쟁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있죠. 역사는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배운다고 하는데요. ‘세계전사 엿보기’에선 ‘넓고 얕은 지식’이라도 인류가 치러야 했던 전쟁이 전하고자 했던 여러 이야기들을 두서없이 전해드릴까 합니다.



[헤럴드경제=문영규 기자]땅을 얻는 싸움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자원을 확보하는 싸움도 아니었죠. 말은 ‘정의’를 위한 싸움이었지만 호주ㆍ뉴질랜드 젊은이들 수만 명은 그동안 가본적도 없는, 잘 알지도 못하는 땅에서 피를 흘렸습니다.

100년 전 터키 겔리볼루(갈리폴리) 반도에서 말이죠.

지난해 영국, 프랑스, 등 세계 각국은 1차세계대전 발발 100주년을 맞아 성대한 기념식을 치렀습니다. 두 번의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국으로서는 기념할 만한 행사죠. 그런데 1차대전 발발 1년 후인 1915년, 영연방 연합군으로 참전했던 호주ㆍ뉴질랜드 연합군(ANZAC)에 있어 ‘갈리폴리 전투’는 쓰라린 패배의 경험을 가져다 준 오욕의 전투입니다.

지휘부의 어이없는 작전 실패로 수많은 젊은이들이 한순간에 목숨을 잃었고, 이후 8개월 여에 걸친 전투에서 호주ㆍ뉴질랜드군을 포함, 연합군의 전사상자는 25만 명에 달했죠. 서부 유럽 전선에만 관심이 모아진 탓에 갈리폴리 전투는 1차대전의 여러 전투들 가운데서도 우리에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전쟁의 일부입니다.

그러나 꽃다운 젊은이들을 잃었던 호주와 뉴질랜드는 갈리폴리 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4월 25일을 현충일로 지정해, 매년 전쟁터에서 사라져간 이들을 기리고 있습니다.


1차대전 당시 연합군은 독일군을 양면에서 압박하기 위해 동부전선의 러시아와 동맹을 맺고 내륙으로 연결할 방법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리스-터키(당시 오스만제국)-흑해를 거쳐 우크라이나 지역을 잇는다는 것이었죠. 그런데 독일과 동맹을 맺은 오스만제국이 이를 가로막고 있었고, 이스탄불을 점령해 터키를 손에 넣는 것이 연합군의 목표였습니다.

갈리폴리 반도와 다르다넬스 해협. [사진=위키피디아]

100년 전, ANZAC군을 주축으로 한 영연방군과 프랑스군 7만 명이 갈리폴리 반도에 상륙했고, 당시 호주와 뉴질랜드를 포함, 뉴펀들랜드 제도 등이 영연방의 일원으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렸습니다.

갈리폴리 반도와 다르다넬스 해협. [사진=위키피디아]

작전은 처음부터 난항을 빚었습니다. 당시 영국 해군성 장관이었던 윈스턴 처칠은 지중해에서 흑해로 진입하는 관문인 다르다넬스 해협을 제압하기 위해 그해 2월 17일 항공모함 HMS 아크로열, 전함 HMS 퀸 엘리자베스 등 영-프 연합함대를 전격 투입했습니다. 기상악화 등으로 인해 해안포 제압에는 실패했죠.

다르다넬스 해협 진입을 시도하는 영국과 프랑스 연합함대. [사진=위키피디아]

실패는 거듭됐습니다. 3월 18일, 구축함, 순양함 등 18척의 전함이 2차 공격을 감행했지만 프랑스 전함 부베가 기뢰에 침몰하고 영국 전함 HMS 이리지스터블과 HMS 인플렉서블이 (어뢰 혹은 기뢰공격으로) 가라앉았습니다.

다르다넬스 해협 진입을 시도하는 영국과 프랑스 연합함대. [사진=위키피디아]

학자들에 따르면 이리지스터블은 공격의 선두에 섰지만 강력한 해안포 공격으로 함선을 선회할 수밖에 없었고, 선회하는 경로에 미리 터키군이 몰래 설치해놓은 기뢰가 터져 침몰했습니다. 전함 부베는 화약고가 폭발하며 선원들이 미처 빠져나올 틈도 없이 순식간에 선체가 기울어져 600명이 수장됐습니다.

인플렉서블을 구조하기 위해 갔던 HMS 오션도 침몰하고 프랑스 전함 수프렌과 갈루아도 피해를 입었습니다. 작전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처칠은 경질됐습니다.

해전의 실패는 비극의 끝이 아니라 서막에 불과했습니다. 4월 25일, 연합군은 작전 방향을 해군의 단독작전이 아닌 육군의 상륙작전으로 전환하면서 대규모 병력 투입을 결정했습니다.

갈리폴리 전투 당시 영국 해군성 장관으로 초기 작전을 입안한 윈스턴 처칠. [사진=게티이미지]
전투는 결국 4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8개월 간 벌어졌습니다. 연합군과 오스만제국 양 측은 각각 25만 명씩 총 50만 명에 달하는 전사상자를 냈죠.

그렇게 시작된 참혹한 전투는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 지휘부의 무모한 작전과 참호전의 비극은 다음회에 전해드리도록 하죠.

ygmoon@heraldcorp.com

맞춤 정보
    당신을 위한 추천 정보
      많이 본 정보
      오늘의 인기정보
        이슈 & 토픽
          비즈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