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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난세계사] ‘카노사 굴욕’…또다른 이야기
[헤럴드경제=이정아 기자] <마틸다 공주의 ‘은밀한 복수’> 2일자 기사 후속편입니다. 토스카나 지역을 관할하는 영주 ‘마틸다’ 시선에서 본 ‘카노사의 굴욕’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 ‘교황 만들기’ 프로젝트= 부모에게서 이탈리아 북부 토스카나 지역의 영지와 함께 카노사 성을 물려받은 마틸다. 마틸다는 교황청에서 실력자로 꼽히는 클뤼니 수도원 출신 힐데브란트를 군사적으로 지원하고 그를 의지하기 시작합니다. 하인리히 가문에 대한 은밀한 복수를 준비하기 위해서였죠. 그리고 마틸다의 아낌없는 지원을 받은 힐데브란트는 1073년 드디어 교황이 됩니다. 하인리히 4세를 파문시킨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 그러니까 ‘카노사의 굴욕’으로 유명한 바로 그 교황이 힐데브란트입니다.

이탈리아의 귀족 카노사.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와 서임권 분쟁을 벌이던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강력한 지원자였다. 그녀의 영지인 카노사 성에서 카노사의 굴욕 사건이 일어났다.

우선 힐데브란트가 교황이 되기 전인 1058년으로 시간을 당겨봅니다. 영주가 된 공주 마틸다. 그는 군대를 동원해 당시 주교였던 니콜라오 2세를 로마로 안전하게 피신시킵니다. 그리고 로렌, 토스카나 지역의 지지를 이끌어 니콜라오 2세가 교황이 되도록 물밑에서 지원하죠. 이 사건으로 힐데브란트의 교회 개혁에 반대하는 세력이 선출한 교황 베네딕토 10세가 도망을 다녀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됐는데, 역사 이래 처음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15년 뒤. 드디어 마틸다가 꿈꿨던 순간이 다가옵니다. 마틸다가 믿고 의지하던 힐데브란트(그레고리우스 7세)가 교황이 된 게 이 때거든요. 마틸다는 이 순간까지 하인리히 3세 앞에서 자신의 어머니가 겪어야 했던 치욕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복수의 칼을 갈아온 마틸다가 니콜라오 2세에 이어 그레고리우스 7세에게 군사를 지원하며 교회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 것도 복수를 위한 ‘물밑 다지기’였던 셈입니다.

#. “22년 전 그날을 기억한다”= 그리고 3년 뒤 어느 날. 교황과 황제가 밀라노 대주교의 ‘임명권’을 놓고 정면으로 충돌하는 사건이 터집니다. 대주교 임명권을 가져와 교황의 권한을 강화시키려고 했던 그레고리우스 7세에 대항해 황제인 하인리히 4세가 지역의 주교들을 모아 교황을 폐위시키고자 했거든요. 신정정치를 꿈꾼 그레고리우스 7세와 차근차근 신성로마제국의 세력을 키워 나가던 하인리히 4세 사이의 오랜 ‘알력’이 수면 위로 떠오른 셈입니다.

하지만 “대주교 임명권을 행사한다”며 그레고리오 7세에게 맞선 젊은 황제 하인리히 4세는 교황에게 파문을 당하게 됩니다. 종교적 공민권 박탈은 물론 황제를 향한 반역까지 정당화할 수 있는 처벌이었죠. 황제의 권력이 커지는 걸 경계했던 독일의 영주들은 반란을 획책하기 시작했고 사태가 심각해지자 하인리히 4세는 부랴부랴 그레고리우스 7세가 있는 카노사의 성을 찾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마틸다도 교황이 카노사의 성으로 향하고요.

마틸다는 성문 밖에서 자비를 구걸하는 하인리히 4세를 차갑고 냉정한 눈길로 바라봅니다. 그 순간 마틸다는 분명 자신의 어머니가 하인리히 3세에게 용서를 비는 모습을 떠올렸을 겁니다. 불과 22년 전 자신의 어머니가 하인리히 3세에게 자비를 구걸했는데 지금은 그의 아들인 하인리히 4세가 마틸다 자신에게 용서를 빌고 있는 정반대의 상황이 펼쳐지다니요. 

마틸다가 다스리던 카노사 성. 북부 이탈리아 레지오 에밀리아 주에 있다.

황제는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용서를 청한 지 사흘 만인 1077년 1월 28일에야 카노사 성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그레고리우스 7세와 마틸다 앞에서 용서를 구하고 겨우 죄를 사면 받게 되죠.

#. 복수는 복수를 낳고=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카노사 성에서 치욕을 겪은 하인리히 4세가 절치부심하며 6년 동안 세력을 키운 뒤 교황이 있는 로마로 진군하거든요. 당시 이탈리아 남부로 피신한 그레고리우스 7세는 결국 하인리히 4세의 손에 의해 폐위를 당하게 됩니다. 독일 지역 영주들의 든든한 지지를 받았던 황제는 자기 입맛에 맞는 새 교황을 앉히죠. 그렇다면 최후의 승자는 하인리히 가문이라고 해야 할까요.

<좌측사진> 카노사 성에서 무릎을 꿇은 황제 하인리히 4세(가운데)와 마틸다(우측)의 모습
<우측사진> 카노사 성 밖에 맨발로 서 있는 하인리히 4세

그것도 아닙니다. 마틸다는 이후 여러 전투를 치르면서도 한편으론 황제에 대한 반란을 조종했거든요. 마틸다의 복수극은 수면 아래에서 남모르게 이어졌던 셈입니다. ‘이탈리아 왕권을 주겠다’는 미끼로 하인리히 4세의 두 아들을 설득시킨 마틸다는 이들로 하여금 자신의 아버지인 하인리히 4세를 폐위시키게 만듭니다. 하인리히 4세. 아들에게 배신당한 상처를 안고 영원히 눈을 감게 됩니다.


(*) 하인리히 4세가 복수에 성공했어도 유럽 국왕 서열 1위인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교황에게 굴종했다는 사실은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에 교황의 힘이 세속군주의 힘을 누르는 시대가 열립니다. 특히 카노사의 굴욕은 자본의 지도까지 바꾸죠. 정치와 종교로 묶여 있던 독일과 이탈리아가 떨어지며 이탈리아 반도의 도시공화국들이 적극적인 무역정책으로 자본을 쌓기 시작합니다. 이로 인해 십자군 전쟁으로 더욱 부를 축적한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일어나고 근대가 열리게 됩니다.

dsu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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