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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승희의 이 장면&이 대사] ‘킬미, 힐미’의 네 번째 인격은 왜 자살지원자일까?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1인 7역으로 맹활약 중인 지성의 네 번째 인격은 자살 중독 고교생이다. 한 사람의 몸 안에 일곱 개의 자아를 가진 다중인격을 소재로 안방을 찾고 있는 수목 안방 일인자 MBC ‘킬미 힐미’다.

누구나 자기 안에 또 다른 자신이 있다고는 하지만 이 남자 안엔 분리된 인격은 너무도 많다. 젠틀한 재벌2세 차도현이 그 몸의 주인. 차도현을 중심으로 비중을 따지니 순위가 매겨진다. ‘제2인격’ 나쁜 남자 신세기, ‘제3인격’ 능청스런 전라도 사나이 페리박, ‘제4인격’ 자살 중독 고교생 안요섭을 비롯해 아직도 세 개의 인격이 더 남아있다.

28일 방송된 ‘킬미, 힐미’ 7회분에선 눈빛에 허무주의를 새겨넣은 열일곱 살 고교생이 등장했다. 지성으로선 20여년의 세월을 거스른 횡재다.

동그란 안경을 낀 모습이 마치 ‘해리포터’를 연상케 하는 안요섭의 짧은 생을 지배하는 것은 오로지 죽음을 향한 갈망뿐이다. 차도현이 만들어낸 네 번째 인격은 ‘다중인격’ 장애를 안고 살며 결코 평범할 수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의 지독한 외로움과 고통이 극대화된 모습으로 나타났다. 결코 멈출 것 같지 않은 고통의 무게가 왜곡된 감정과 만나며 끝모를 염세주의로 치닫게 된다.

7개의 인격이 공존하는 몸 안에서 네 번째 인격이 차지하는 존재감은 그리 크지 않아 보였다. 네 번째 인격인 안요섭이 스스로 느끼는 존재감이 그렇다.


끊임없이 ‘몸의 주인’(차도현)과 싸워 그를 잠재우려는 제2인격 신세기나 짧게나마 자신에게 자유를 주는 것에 행복해하던 제3인격 페리박과 달리 네 번째 인격은 존재 자체의 허무로 뭉쳐있다. 존재해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 온전히 자신으로 살 수 없는 사람, 존재했다는 것조차 알릴 방법이 없는 사람의 모습이다.

“아마 저 하늘이 내 무덤이 될 것”이라며 7개의 인격을 그려놓는 것으로 다잉 메시지를 남긴 안요섭은 “죽고 나면 다잉 메시지가 무슨 소용이냐”는 정신과의사 오리진(황정음 분)에게 “적어도 차도현 몸 속에 우리가 살았었다는 건 알게 되겠지”라고 말한다.

한 사람의 몸을 하고도 온전히 하나로 살 수 없는 거대한 성 안에 갇힌 괴물이자, 일생의 한 순간도 자신으로서 살 수 없는 소년은 다른 누구의 손도 빌리지 않고 스스로를 죽이려 한다. ‘킬 미(KILL ME)’.

어차피 삶이란 고통으로 가득차 있기에 안요섭에겐 미련이 남을리 없다. 그런 안요섭의 눈에 잠시 비친 공허한 눈물은 생을 향한 아쉬움이 아니라 누구도 손 내밀어 주지 않았던 단역 인생의 상처였다.

드라마에선 온갖 허무를 새겨넣은 눈빛을 한 열일곱 소년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안요섭, 천재에 가까울 만큼 두뇌가 명석하고, 자존심이 강한 인격. 뛰어난 심미안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추한 것을 병적으로 싫어한다. 염세적이라 죽음을 동경한다.”

개인적 고통으로 점철된 인생 역시 정치적으로 압박받는 시대적 절망을 끌어안은 사람들처럼 모든 것이 애수이자, 자포자기일 수도 있다. 안요섭이라는 캐릭터의 특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문인들이 등장했던 시절이 있었다. 1930년대 식민지 조선에 등장한 문인지 ‘백조’, ‘폐허’, ‘장미촌’은 한국 문학의 낭만주의를 이끌었다, 특수한 상황 안에서 그들이 분출했던 자발적인 감정은 염세와 허무, 퇴폐뿐이었다.

박종화 이상화 박영희 시인이 ‘백조’에 실었던 시들은 이 같은 경향이 짙었다. ‘말없이 걷는 칠흑의 하늘, 주토의 거리로 돌아가자’는 ‘사의 예찬’(박종화), ‘그리우는 그림자를 잠은 안고서/ 꽃피는 꿈길을 달아날 때에/바람에 불붙는 잠의 집 속에/생의 고통은 붉게 타도다’라던 ‘꿈의 나라로’(박영희), ‘마돈나 밤이 주는 꿈, 우리가 얽는 꿈, 사람이 안고 궁그는 목숨의 꿈이 다르지 않느니. 아 어린애 가슴처럼 세월 모르는 나의 침실로 가자, 아름답고 오랜 거기로’(이상화, ‘나의 침실로’)라며 밀실과 죽음을 심리적 도피처로 삼고 있다. 이 시들이 그려가는 죽음의 이미지는 한결같이 탐미주의적이며, 그 곳이야말로 모든 고통을 씻을 수 있는 마지막 낙원이다. ‘자살지원자’ 안요섭에게도 그것은 유일한 도피처이다.

지독한 허무주의와 염세주의가 내려앉은 안요섭에게 매달려 ‘죽지 말라’고 ‘도망가는 것이 아니냐’며 절규하는 오리진의 외침은 사실 감흥이 없다. 살아가야할 사람이 죽기로 결심한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리 없으며, 생이 간절한 사람의 안타까움을 삶을 버리려는 사람이 공감할 수 없다.

결국 안요섭을 멈춘 것은 잠들어 있던 제1인격 차도현이었다. 지독한 고통과 외로움 속에서도 자신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던 사람이 깨어나서야 상황은 진정된다. ‘죽여야 살 수 있다’는 드라마의 제목처럼, 어차피 죽음에 대한 갈망보다 생을 향한 갈망이 더 큰 법이니까. 안요섭의 다잉 메시지를 바꾼 건 오리진이다. ‘힐 미(HEAL ME)’.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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