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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생식물보호 한평생... 용인한택식물원 이택주원장의 작은소원?
[헤럴드경제=박정규(용인)기자]세계는 지금 식물종의 유전자 확보를 위한 전쟁을 벌이고 있다. 영국 미국 일본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스위스 등 선진국들은 이미 200여년 전부터 이같은 총탄없는 전쟁을 벌여왔고 유전 과학의 중흥기를 맞아 그 양상은 더욱 치열함을 더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수백종의 자생식물 유전자원이 외국으로 반출, 새 품종으로 개량돼 역수입되는 기현상을 보이는 등 유전자원 관리에 구멍이 뚫린 상태다. 국립식물원도 하나 없는 시점에서 식물 유전자원의 체계적인 관리를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인지도 모른다.



위기에 처한 자생식물을 자식처럼 24년째 키우고 있는 한택식물원 이택주(73)원장은 이같은 자생식물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삶의 모두를 바친 인물이다.

26일 찾아간 경기도 용인시 백암면 옥산리 비봉산 자락의 한택식물원은 20여만평의 드넓은 동산에 각양각색의 앙징스러운 식물이 자태를 올해 한껏 뽐낼 ‘풀과 꽃들의 경연장’을 가꾸기위해 이원장은 직원과 함께 한겨울에도 온실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저의 땀과 눈물이 곳곳에 배어있는 곳이기도 하고 거센 풍파에 내동댕이 쳐졌던 우리 풀과 꽃들이 겨우 얻어낸 안식처이기도 하죠.”

이원장은 한택식물원의 이름없는 들풀 한포기, 나뭇가지 하나하나 모두가 자신의 인생이자 분신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한택식물원에는 고사리와 잡초를 제외하고 수목류 1200여종과 자생화 1200종 등 2400여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다. 여기에 외국종을 합치면 총 9000여종이 된다. 남북한을 통틀어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식물은 모두 3700여종에 이르는 것을 감안해 볼 때 이 식물원의 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명실상부한 동양 최대 식물원인 셈이다.

여느 식물원과 달리 이곳은 자연 그대로의 지형에 식물의 서식지를 만들어 줬기 때문에 ‘동양최대’라는 수사보다는 차라리 ‘고향 뒷동산’이라는 표현이 알맞을 정도로 아기자기하다. 그러나 이원장이 고향 뒷동산같은 이곳에서 키우고 있는 꿈은 결코 예사롭지 않다.

“세계적인 식물원이 되기 위해서는 면적보다는 얼마나 많은 유전자원을 보유하고 있고 또 얼마나 과학적인 연구기능을 갖추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그 두가지 측면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제게 남은 과제입니다.”

세계 어느곳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식물원을 만들어 가고 있는 이원장도 40대 초반까지 식물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 왔다. 한양대 토목공학과를 나와 건설회사에 근무하면서 전국 곳곳의 건설현장을 누비던 그는 지난 78년 회사를 그만두고 고향인 용인으로 내려와 축산농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82년까지 현재 식물원 자리인 선산을 초지로 일궈 한우와 젖소를 키웠지만 당시 정부의 쇠고기 수입으로 소값이 폭락하는 바람에 대부분의 축산농가와 마찬가지로 빚만 진 채 주저앉아야 했다.

자포자기한 채 얼마간을 지내다가 ‘빚이라도 갚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소를 키우던 초지에 조경용 나무와 자생식물 몇가지씩을 심어나가기 시작했다.

“나중엔 이곳 저곳에서 구해다 심은 자생식물이 100여종에 달했는데 특별히 돌봐주지 않아도 생명을 이어가는 ‘식물의 힘’에 매료가 되더라고요.”

꽃과 나무심기에 천천히 재미를 붙여가던 이씨가 본격적으로 우리 고유식물 가꾸기에 나선 것은 85년. 우리 고유의 야생화로 알았던 봉숭아나 민들레가 외국에서 들여온 식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큰 충격을 받은 후였다. 그는 이때부터 우리 자생식물을 본격적으로 찾아 나서게 됐다고 한다.

특히 자생식물에 대한 매료가 ‘애착과 집념’으로 발전하면서 그는 돈벌이를 위한 조경수 재배를 팽개치고 전국을 떠돌기 시작했다.

설악산 지리산 한라산 등 유명산은 말할 것도 없고 울릉도 백령도 진도 등 섬 구석구석과 전국의 하천, 멀리는 중국 티베트 몽골에까지. 자생식물을 위한 그의 순례는 끊이지 않았다.

20여년을 이어온 순례를 통해 이씨는 설악산 향로봉에서만 자라는 ‘난쟁이붓꽃’, 울릉도와 동해안에서 자라는 ‘두메부추’, 한라산의 1500m이상 고산지대에서만 자라는 ‘고산술패랭이’, 주왕산의 바위틈에서 자라는 ‘둥근잎 꿩의비름’, 대암산에서 자라는 ‘비로용담’과 ‘섬노루귀’ ‘광릉요강’ ‘산솜방망이’ 등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자생식물들을 자신의 동산에 옮겨 심었다.

89년에는 주왕산의 ‘둥근잎 꿩의비름’을 수집하던 중 가파른 암벽에서 발을 헛디뎌 떨어졌다가 바위틈에서 자란 소나무를 잡고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일도 있었다.

이렇게 수집한 자생식물 중 그가 가장 아끼는 것은 설악산에 헬기장과 산장을 만들면서 마구 잘려나가 멸종위기에 놓인 ‘설악눈주목’, 설악산 권금성의 ‘솜다리(일명 에델바이스)’, 울릉도 마구잡이 개발로 멸종되다시피한 ‘고추냉이’ 등이다.

이원장은 무분별한 개발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라도 이들을 더욱 정성껏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이같은 이씨의 정성과 고집·노력으로 조성된 한택식물원은 지난 2003년에 일반에 공개됐다. 그동안 전문가와 식물학을 공부하는 대학생에게만 개방했지만 우리 자생식물을 알리고 보급하기 위해더욱 노력하겠다는 것이 이씨의 생각이다.

“외국에서는 국빈방문때 ‘퍼스트 레이디’가 가장 먼저 찾는 곳이 국립식물원입니다. 그만큼 식물원은 그 나라의 ‘문화 수준’을 알 수 있는 잣대가 되는 것이죠.”

그러나 이원장이 바라보는 우리의 종자보호 대책과 자생식물 육성책은 아직 멀기만 하다.

“1899년부터 8년동안 영국인 윌슨이 중국에서 무려 6만5000종에 대한 식물정보와 종자를 가져갔습니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외세강점기 이후 우리의 귀중한 식물자원도 역시 알게 모르게 바다를 건너갔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젠 그런 것들이 속속 신품종으로 개발돼 우리나라로 역수입되고 있으니 참 안타까운 일이지요.”

그는 라일락 구상나무 백합 원추리 등 상당수 외국 품종들이 우리 자생식물을 가져가 만든 개량종이라고 아쉬워했다. 또 정부가 우리의 야생화초 보존과 연구에는 무관심한 채 로열티를 물어야 하는 외국의 각종 화초를 일선 재배 농가에 권유하는 것은 시급히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3년 전부터 정부가 우리 야생화초를 거리 화단에 심기 시작했으나 그 양은 전체의 1%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아직도 외국 화초 일색이죠. 유럽국가와 일본 등 선진국들은 이미 100년 전부터 종자전쟁에 대비해 자국의 식물 보존과 연구에 박차를 가해 왔고 다른 나라의 식물에도 눈을 돌려 종자 확보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젠 우리 정부와 관련기관도 자생식물에 눈을 돌려야 할 때입니다.”

2시간여 동안 식물원 곳곳을 돌며 기자와 대화를 나눈 이원장은 걸음을 옮기면서도 풀 한포기 꽃 한송이를 예사롭게 지나치지 않았다. 시든 잎은 떼어내고 밖으로 나온 뿌리는 묻어주고 한시도 쉼이 없는 움직임 속엔 갓난애를 돌보는 아버지의 인자함이 배어있었다. 그 인자함과 사랑이 오늘날 한택식물원을 있게 한 것이다.

최근 한택식물원을 찾은 한 원로 식물학자는 이원장을 ‘자생식물을 지키기 위해 먼저 가신 조상님이 보낸 사람’이라고 지칭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자네 소 농사 짓다 망하길 잘했네. 대학교수도 정부도 하지 못했던 일을 자네가 해냈어. 이제 우리도 어엿한 식물원을 가지게 됐고 조상님이 지켜주신 자생식물을 이어갈 수 있으니 그나마 면목이 생기네. 고맙네 택주”

fob140@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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