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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갑질없는 세상, 新노무족> 리더층 갑질도 문제지만, 진상고객들도 큰 문제
[헤럴드경제=이정환ㆍ손미정ㆍ김성훈 기자]“내가 여기 VIP 고객이다. 내가 그럴만한 집안이기 때문에 소리를 지르는거야.”(마트 VIP 사건), “내가 백화점 한번 올때마다 700만원 이상씩 쇼핑한다.”(백화점 모녀 사건).

최근 논란이 된 고객 갑질 사건에서 해당 고객들의 공통점은 일관되게 본인이 ‘대단한 고객’임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주(사회 고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가 어느 때보다 강조되고 있는 현 사회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보도되는 고객 갑질 사례는 결코 반갑지 않다.

이렇듯 요즘 ‘갑질논란’의 중심에 있는 것은 대기업도, 고용주도, 건물주도 아닌 ‘고객’이다. 사는 사람과 파는 사람 사이에서 형성되는 포괄적 의미의 갑을관계 속에서 고객 스스로가 ‘왕이다’고 착각하는 데서 비롯된 결과다. 한 유통업계 관계자는 “ ‘고객이 왕이다’라는 자본주의가 낳은 불편한 철학에서 태어난 우리사회의 단면”이라며 “소비자가 본인이 갑이라고 생각하고 과도한 친절을 강요하거나 악용하면 그게 곧 갑질로 연결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갑질 논란, 그 시작은=‘갑(甲)의 횡포’의 스펙트럼이 과거에는 통상 대기업 집단에 머물렀다면 이를 고객으로까지 넓힌 결정적인 사건이 바로 ‘라면 상무 사건’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한 중견제과업체 회장이 호텔 지배인을 폭행한 사건이 발생, 사회적 지위를 남용한 갑질에 대한 사회적 민감도는 더욱 높아졌다. 당시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을 방문한 중견 제과업체인 프라임베리커리 회장이 이동주차를 요구하는 호텔 현관서비스 지배인을 폭행, 한때 해당 업체의 제품 불매운동이 일기도 했다.

SNS, 인터넷 커뮤니티의 활성화로 우리 사회 곳곳에 숨어있던 ‘고객 갑질’ 양상들이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50대 어머니와 20대 딸이 백화점 주차요원의 무릎을 꿇린 이른바 ‘백화점 모녀 사건’, 고장난 휴대폰 기기를 바꿔주지 않는다며 소란을 피운 후 말리던 보안업체 직원의 멱살을 잡은 ‘마트 VIP 사건’ 등이 그 대표적인 예다.

전문가들은 서비스 제공자 입장에 대한 ‘공감 부족’을 갑질이 생겨나는 원인으로 지적했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백화점 갑질 모녀 같은 경우는 모두가 그렇다기 보다는 일종의 특수한 사례로 볼 수 있다”며 “공감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서비스를 제공받는 사람의 입장에 있더라도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의 입장을 알아야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갑질은 그 사회 공존의 문화를 파괴하며, 국가는 물론 기업경쟁력을 갉아먹는 요인으로 꼽힌다. 서로 배려하는 갑과 을의 공존의 문화는 그래서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갑과 을, 을과 갑의 공존의 문화를 강조하고 있는 롯데백화점 고객상담실의 한 풍경. [이상섭 기자/babtong@heraldcorp.com]

▶‘블랙컨슈머’ 탓에 속 타는 유통업계=모든 업계에서 고객만족이 최우선 목표가 되면서 이를 악용해 악성민원을 제기하는 ‘블랙컨슈머(balck consumer)’들이 등장했다. 특히 고객 갑질이 공론화되기 전부터 대고객 서비스를 제공하는 유통업계에서는 이 같은 블랙컨슈머들의 ‘갑질’에 속앓이를 해왔다.

모 백화점의 고객 B 씨는 고의적으로 잘못된 배송주소를 기재한 후 배송이 잘못됐다며 밤 늦은 시간에 담당자에게 욕설과 폭언을 하고 상품권을 피해보상을 요구했다. 해당 담당자가 업무 종료시간 후임에도 주문한 상품을 갖고 방문했으나 욕설과 함께 뺨을 2~3회 폭행당했고, 이 밖에도 B 씨는 70여차례에 걸쳐서 악의적인 민원을 무차별적으로 제기했다. 해당 백화점 관계자는 “백화점 직원에게 개인적인 심부름을 시키기도 했다”고 했다.

이미 사용한 상품에 대해 교환 혹은 환불 요구를 하는 경우는 허다하다. 한 백화점에서 홍삼 10뿌리를 구매한 한 고객은 7뿌리를 먹고 “힘이 나지 않는다, 가짜홍삼이다”며 나머지 3뿌리를 환불 요청을 하는가 하면, 한달 여동안 구두를 신고서는 허리디스크가 생겼다며 해당 매장에 환불과 정신적 피해배상을 요구하기도 했다. 구입 후 3년이 지난 코트를 갖고와서 불량품이라며 환불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반품율이 높은 홈쇼핑업계는 비슷한 유형의 블랙컨슈머의 활동이 더 활발한데, 고객 C 씨의 경우 홈쇼핑에서 상품을 구입한 후 사용한 제품을 불량 혹은 단순 변심의 이유로 100여건 넘게 반품해 블랙리스트에 오르기도 했다.

▶“갑질은 신자유주의, 고용유연화와 엮여 있어”=고객의 터무니없는 요구 앞에서도 결코 ‘친절함’을 잃어서는 안된다. 이 시대의 ‘갑질’은 결국 서비스 제공자가 행하는 감정노동을 서비스 이용자가 악용하는 데서 시작한다.

고객은 본인이 지불하는 돈을 빌미로 ‘갑질’을 하고, 직원은 ‘감정노동자’가 되는 현실에 대해 전문가들은 신자유주의, 고용유연화 등 사회구조와 긴밀하게 연관돼 있다고 분석했다. 김태흥 감정노동연구소 소장은 “을은 대부분 비정규직이나 파견직이다. 기업입장에서는 지켜줄 이유가 없는 사람”이라며 ”이들은 을도 아닌 병(丙)이나 정(丁) 쯤 된다“고 했다.

갑질이 연일 이슈가 되고 있는 요즘, ‘갑질이 어디까지 용인돼야 하냐’에 대한 사회적 합의도 필요하다는 조언도 나온다. 설동훈 교수는 “감정노동과 같은 서비스가 생겨나는 것은 일정부분 어쩔 수 없지만 그들에게 어디까지의 친절을 요구할 것인지, 갑질이 어디까지 용인돼야 하는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나 교육이 필요하다고 본다“고 했다.

balm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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